두기고(Τύχικος, Tychicus)
-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사람 -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골로새서 4장7절 -
Τὰ κατ’ ἐμὲ πάντα γνωρίσει ὑμῖν Τυχικὸς
ὁ ἀγαπητὸς ἀδελφὸς καὶ πιστὸς διάκονος καὶ σύνδουλος ἐν κυρίῳ,
Tychicus will tell you all the news about me.
He is a dear brother, a faithful minister and fellow servant in the Lord.
- New International Version -
바울이 살던 주후 1세기 로마는 인구의 약 절반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와 당나귀는 똑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노예는 사람대접을 못 받았습니다.
노예시장에 가면 반나체가 돼서 단 위에 전시돼 있는 노예들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구경을 하다가 마음에 들면 사 갑니다.
집에 가서는 주인이 자기이름을 새긴 귀걸이를 달아줍니다.
그 순간부터 노예는 귀걸이를 달아준 사람의 소유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기 이름이 없습니다.
먼저 사온 노예는 첫째, 그 다음은 둘째, 그 다음은 셋째로 불렀습니다.
로마서를 대필한 사람이 더디오(Τέρτιος)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로마서16장22절)
더디오는 "셋째"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도 옛날에 자식을 많이 낳아서 지을 이름이 마땅치 않으면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 일용, 이용, 삼용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시대에 첫째, 둘째, 셋째라고 불린 사람들은 노예들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노예들에게 이름을 주는 것까지 마땅치 않게 생각을 해서 그냥 첫째 노예, 둘째 노예, 셋째 노예라고 불렀습니다.
노예는 자기생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꿈, 계획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할 줄 아는 짐승처럼 그저 주인인 귀족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를 소개할 때 '난 노예요'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노예요'라고 소개하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바울은 당대의 석학이었습니다.
시민권을 가진 당당한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를 예수님의 노예로, 예수님의 종으로 소개하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은 복음의 핍박자이며 훼방자였습니다.
그런 바을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약속하셨던 인류의 메시야요, 이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이요,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종으로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초라하게 힘없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그분이 수 천 년 동안 인류가 대망하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어디를 가나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고 소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없어지고 예수님만 남은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아무 값도 받지 않고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의 종 됨은 잘 먹고 잘 살거나, 혹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바램에서가 아닙니다.
그의 종 됨은 오로지 복음을 위한 선택이었고 헌신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시작합니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로마서 1장1절)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맨 앞줄에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빌립보서1장1절)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파울로스 둘로스 크리스투 예수, Παῦλος δοῦ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이라고 한 것은 충격적인 자기소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여기서 명백하게 규정했습니다.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Paul, a servant of Christ Jesus)'이라고 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가 일단 어감상 좋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주체성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에게 그 단어는 치명적입니다.
'종은 무슨 종이냐?고 합니다.
내 정체성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 자신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람이나 조직에 종속적으로 살면 안 됩니다.
삶을 주체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재미있는 인생을 여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종’에는 두 가지 삶의 능력이 변증법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는 순종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함으로써 그 외의 모든 것에서 자유을 얻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逆說)입니다.
힘들어도 억지로 종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종의 삶이 자유의 원천이라서 자발적으로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위 잘 나가는 현대인들의 삶이 지금은 풍성해지는 듯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실하게 노력하거나 운이 좋아서 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즐긴다고 해서 자유로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옛날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억지로라도 흥미거리를 두리번거립니다.
피곤할 정도로 흥미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그 어떤 인간도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고 나름으로 성취했어도 본질에서 종이라는 실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종으로 사는 것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종으로 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겠습니까?
그 선택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을 종으로 규정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 로마서 1장1절 -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대표적인 사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한 자들입니다.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된다는 사실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의 차원에서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그걸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감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바울처럼 자기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두기고는 주 안에서 함께 예수님의 종이 된 사람입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 골로새서4장7∼11절 -
1. 두기고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사람'입니다.
"주 안에서(엔 퀴리오(ἐν κυρίῳ)"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그의 편지 가운데 164회나 사용하고 있고, 특히 그의 옥중서신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주 안에(in the Lord)' 놀라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율법에 몰두해 있을 때는 명예나 세상 물질, 지식이 가장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특별히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며,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후에 그는 율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놀라운 선물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주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주 안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속량이 있습니다.
주 안에는 생명의 약속이 있습니다.
주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있습니다.
주 안에는 구원과 영원한 영광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의롭게 됩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부요해질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항상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는 온 우주의 주권이 있습니다.
주 안에는 모든 것, 충만이 있습니다.
주 안에 하나님의 권능과 속성의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을 '주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이 발견한 '주 안에' 있는 은혜와 축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2. 두기고는 바울과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사람'입니다.
7∼11절에는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 단어는 “함께(엔, ἐν)”입니다.
“함께(엔, ἐν)”가 여러 번 반복된 것은 중요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7절에서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에서 ‘함께’가 나옵니다.
함께 종이 된 자(σύνδουλος, 쉰둘로스)
9절에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에서 ‘함께’가 또 나옵니다.
오네시모와 함께(σὺν Ὀνησίμῳ, 쉰 오네시모)
10절에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에서 ‘함께’가 또 나옵니다.
함께 갇힌 자(συναιχμάλωτός, 쉬나이크말로토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에서 또 ‘함께’가 나옵니다.
함께 일하는 (συνεργοὶ, 쉬네르고이)
교회는 이처럼 '주 안에서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9절에 나오는 오네시모는 골로새 지역 출신의 노예였습니다.
그것도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였습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빌레몬 1장18절)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노예가 도망가는 것을 아주 중한 죄로 다루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도망간 종을 집에 숨기거나 재워 주기만 해도 함께 벌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 오네시모를 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아들 오네시모’(빌레몬 1장10절)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기 전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였다고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는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주인인 빌레몬에게도 유익한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빌레몬 1장11∼12절)
바울은 이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내 심복’ 곧 ‘내 심장’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10∼11절은 아리스다고, 마가, 유수도라 하는 예수를 소개합니다.
이들은 모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할례파)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 중에 자신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사역하는 자들이며,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먼저 언급된 아리스다고는 사도행전 19장29절에 등장합니다.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그는 마게도냐 지역의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 숭배자들에게 잡혀 연극장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바울과 동행했습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사도행전 20장4절)
바울이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로 항해할 때도 함께 했습니다.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사도행전 27장2절)
그는 본문 10절에 따르면, 바울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죄수의 몸(10절)이 되어 바울 곁에서 동고동락하며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다음으로 소개되는 할례파 인물은 마가 요한입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바울을 발탁해서 교회의 지도자로 세운 바나바의 생질(사촌, 친척)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마가를 데려고 1차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도중(밤빌리아)에 포기하고 예루살렘 집으로 되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사도행전 13장13절).
바나바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할 때, 마가 때문에 심각하게 다툽니다.
바울은 마가를 전도여행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합의를 보지 못하고, 팀을 나눠서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배를 타고 구브로로,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육로를 통해 소아시아 지역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사도행전15장36-41절).
이처럼 한 때,. 바울은 마가 요한이 범한 실수로 인해 그를 아주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랜 후, 마가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그를 환영하며 맞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복음 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지만, 이제는 큰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유스도라 하는 예수(Jesus, who is called Justus)입니다.
유스도는 '예수'를 라틴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마리아라는 이름과 함께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우리에게 철수나 영희라는 이름처럼 흔한 남자의 이름이었습니다.
유대인 출신인 그도 사도바울이 갇힌 감옥에 함께 갇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사역하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세 동역자들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11절)
이처럼 두기고는 사도바울, 그리고 감옥에까지도 함께 했던 세 명의 유대인과 함께 복음전파의 동역자였습니다.
두기고를 비롯해 세 며의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우며, 함께 동고동락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복음사역은 이처럼 '주 안에서 함께 섬기는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집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이 세상 모임과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주님이 주신 그 사랑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를 주고 얻는 성도로 살아야 합니다.
한 때의 갈등과 실수는 뒤로 하고 복음을 위해서 서로에게 유익한 존재로 서 있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함께 하면서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로 서로 격려하며 위로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두기고를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두기고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두기고처럼 바울과 함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두기고가 바울과 함께 동역하며 서로 위로를 안겨주었던 것처럼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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