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성경의 인물 / 두기고(3)-사랑 받는 형제

가족사랑 2024. 12. 1. 07:30

두기고(Τύχικος, Tychicus)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골로새서 4장7절 -

Τὰ κατ’ ἐμὲ πάντα γνωρίσει ὑμῖν Τυχικὸς

ὁ ἀγαπητὸς ἀδελφὸς καὶ πιστὸς διάκονος καὶ σύνδουλος ἐν κυρίῳ,

 

Tychicus will tell you all the news about me. 

He is a dear brother, a faithful minister and fellow servant in the Lord.

New International Version -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인사에 앞서  두기고를 골로새교회로 보낸다고 말합니다.

두기고(Τύχικος, Tychikos)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의 형편(形便)을 골로새교회에 알려주며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도 동시에 전달합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출신으로 바울의 3차 선교여행 때 그리스에서 드로아까지 바울을 수행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을 때 바울의 편지(에베소서, 골로새서)를 가지고 소아시아에 위치한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에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두기고는 빌립보교회 등 이방 지역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보낸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7명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훗날 디도와 디모데를 대신해 그레데와 에베소교회로 파송되기도 했습니다.

두기고는 이처럼 바울 사도의 동역자(同役者, fellow worker)로, 조사(助事)로 직무를 수행한 사람한 성도입니다.

두기고 -  사랑 받는 사람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가리켜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받는 형제'에 대한 말씀을 묵상합니다.

두기고는 사랑받는 형제(아가페토스 아델포스, ἀγαπητὸς ἀδελφὸς)였습니다.

살다보면 많은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그중에는 얼굴만 아는 사이가 있습니다.

조금 가까운 사람도 있습니다.

속내를 터놓는 아주 가까운 관계도 있습니다.

죽고 못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여러 갈래로 얽히고설킨 많은 인간관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사랑받는 형제라 부를 만큼 친밀하고 아끼는 관계를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슴에 오래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과 나눈 대화가 기억나는 사람, 생각하면 미소기 피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말을 아십니까?

지란지교(芝蘭之交)는 명심보감(明心寶鑑) 교우(交友)편의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같이 향기로운 사귐이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높은 사귐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대로 옮기면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사귐을 뜻합니다.

지초와 난초는 둘 다 향기로운 꽃으로, 지란지교는 곧 지초와 난초처럼 맑고 깨끗하며 두터운 벗 사이의 사귐을 일컫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편지를 골로새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편지를 에베소 교회에도 전달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디도의 후임으로 그레데 섬에서 사역하기도 했습니다.

두기고는 그 후 에베소 교회에서도 사역을 했습니다.

이를 볼 때 두기고는 굉장히 믿음직한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능력도 많고, 은사도 많지만 한 교회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점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자주 부딪힙니다.

일은 좀 못해도 되지만 좋은 성품은 가져야 합니다.

좋은 성품이 따르지 못하면 아무리 재능과 능력이 많아도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진행이 안 됩니다.

오히려 일이 끝난 후에 더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두기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두기고를 소개할 때  그는 '사랑받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의미하는 헬라어 <아가페, ἀγάπη>의 형용사형은 <사랑받는>입니다.

헬라어로는  <아가페토스, ἀγαπητός>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실 때 사용하였던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장16∼17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에게 사용되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3435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하시며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진짜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해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감성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의 본에 따라 우리의 삶에서 그 사랑을 나누며 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당신은 진짜 그리스도인 맞소.’라고 인정해 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베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조그마한 사랑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부모님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심어 주셔서 그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아가페의 사랑이라면 그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랑이 바로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아가페의 사랑을 이미 받아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두기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기고가 어떤 사람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통해서 우리는 두기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3차 선교여행 중에 동행하여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에 동역했던 사람입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사도행전 20장4절)

두기고는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와 골로새에 편지를 보낼 때 사도 바울의 그 편지를 그곳에 전달했습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에베소서 6장21절)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서 목회하고 있는 디도에게 ‘니고볼리로 오라’는 전갈을 보낼 때에 바울의 편지를 갖고 그레데 섬까지 디도를 찾아갔던 사람도 두기고였습니다.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디도서 3장12절)

이런 기록들을 볼 때, 두기고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때 사도 바울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줄곧 사도 바울의 수족과 같이 궂은 일과 잔심부름을 마다하지 않고 다 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두기고가 사도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을 만난 이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할 때까지 거의 10년 동안 사도 바울 곁을 지킨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사도 바울의 손과 발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이 두기고였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두기고를 가리켜 ‘사랑 받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받는 형제’라는 말은 두기고가 사도 바울에게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를 쓰면서 골로새 교인들에게만 두기고를 ‘사랑받는 형제’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두기고는 ‘사랑을 받은 형제’라고 쓰고 있습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에베소서 6장21절)

두기고는 사도 바울 자신에게만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도 사랑받는 형제였습니다.

 

두기고는 성경에 그 이름이 자주  자주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두기고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 받는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두기고가 '사랑 받는 형제'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기고가 이처럼 사랑받는 형제라고 인정을 받은 것은 그가 먼저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기적입니다.

쉽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쉽게 마음을 열어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마음을 엽니다.

두기고가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두기고가 먼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두기고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동안 거의 10년 가까이 바울의 뒷바라지를 했던 사람이 두기고였다고 말합니다.

죄수의 몸이 되어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10년을 하루 같이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나이 들고 몸이 연약한 때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두기고는 바울의 힘든 시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섬겨주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두기고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두기고가 바울을 위해서 10년을 하루 같이 그렇게 수고해준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사랑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을 위해서 그 힘든 뒷바라지를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두기고가 그렇게 숱한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사도 바울을 위해서 기꺼이 수고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섬겨준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두기고 - 바울이 형제라고 부른 사람

두기고는 바울의 ‘사랑을 받은' 성도이면서, 또한  '바울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두기고를 가리켜 ‘사랑 받는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兄弟)’라는 말은 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관계. 남자 형제(兄弟)와 여자 자매(姉妹)를 아울러 칭하는 말입니다.

촌수로 따지면 2촌입니다.

보통 남성간은 형제, 여성간은 자매, 남녀간은 남매로 부르지만, 어느 쪽도 통틀어 형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신분의 차이가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특히 노예는 주인의 재산에 불과하였습니다.

병든 노예는 밖에 버렸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소유하는 비윤리적, 비신앙적 악습은 극심한 상호 불신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형제'라고 불러서 성도는 한 가족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한 거지가 나타나 자선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그의 주머니에는 거지에게 줄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거지에게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나의 형제여, 제발 내게 화내지 마세요,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동전 한닢이 없군요. 내게 돈이 있었다면 기꺼이 당신에게 주었을 겁니다”

그러자 거지는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구걸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었어요. 당신은 나를 형제라고 불러주었으니까요”

거지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형제’라는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향해 물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형제’로 품어 줄수 있는 따뜻한 가슴과 말 한마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형제'란 단어의 헬라어는 아델포스(αδελφός)입니다.

형제 알파(α) 델퓌스(δελφυς) ‘자궁, 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서 알파(α) 하마(άμα)의 축약형으로 연합의 의미로 적용됩니다.

주님의 아델포스(αδελφός) ‘형제는 하나님 나라의 델퓌스(δελφυς) ‘자궁,  곧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합니다.

한 자궁에서 나왔다는 의미로 '아델포스'는 예수의 피로 나눈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2장11절 말씀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자기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 우리를 형제(αδελφός:아델포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형제로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주님과 우리가 한 분 하나님께로 태어났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 사이는 바로 친형제 사이가 됩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 마가복음 3장 3135절 -

 

예수님께서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닌 새로운 영적 가족이 탄생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혈육의 가족들은 밖에 있습니다.

31절에  “밖에 서서”,  32절에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34절에는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밖에 서있는 자들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함께 앉아있는 자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인간적인 상황으로 묘사하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밖에 기다리고 있다면, 맨발로 뛰어나와서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밖에 있는 자들과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리고 밖에 서있는 자들을 외면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으로 시선을 돌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형제"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은 두기고를 ' He is a dear brother'라고 했습니다.

바울을 통해 신앙생활하게 된 두기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두기고를 향해 사도 바울은 '그는 나의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과 함께 깊은 교제가 없이 날마다 밖에서 예수님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수십 년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하고 성전 밖으로만 맴돌며 예배당 마당만 밟고 가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마냥 낙심만 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무리 중에 함께해서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로써 복음 위해서 살게 된 것에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됩니다.

다른 형제였던 유다는 신약성경 유다서를 집필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되는 특권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과 함께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육신의 핏줄을 넘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가족입니다.

두기고처럼 사랑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두기고처럼 예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한 걸음 더 가까이 이웃에게 다가서야 하겠습니다.

두기고처럼 '사랑받는 형제'로 살아가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