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Much Land Does a Man Require?
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1828∼1910)-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합니다.
'자, 그럼 승부를 해 보자! 내 너에게 땅을 듬뿍 줄 테니, 그걸로 널 사로잡아 주지!'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파홈은 소유한 땅을 불려갑니다.
그러나 파홈은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낍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파홈은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파홈은 그 유목민을 찾아갔습니다.
유목민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의 계약금으로 구간의 내부 면적만큼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000 루블(오늘날 돈으로 약 100만 루블, 약 18,500,000원)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계약금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파홈은 이 조건을 승낙합니다.
그리고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합니다.
파홈은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파홈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합니다.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집니다.
그리고 파홈은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파홈은 도착한 곳에서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죽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습니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로.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납니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민담과 복음서의 우화를 각색하여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있느니라>,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의 단편을 썼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단편들을 통해 인간 욕망의 무상함,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 소박한 민중적 삶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요?”
"How Much Land Does a Man Require?"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에게 필요했던 땅은 그가 묻힐 반 평 크기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풍족해지길 원합니다.
하지만, 사실 지금 것으로도 충분할지 모릅니다.
단지 지금보다 더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풍족을 충동하고 있습니다.
‘욕심’이란 적당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아픔의 결국에 이릅니다.
지나친 욕심은 더 갖지 못함에 대해 괴로워하다가 정신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욕심은 정신 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피폐하게 만들어 결국 자신을 망가뜨립니다.
톨스토이의 이 단편소설은 땅이나 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의 욕심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하는 '풍선 크게 불기' 시합이 있습니다.
풍선을 크게 불수록 푸짐한 상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조금만 더 하고 욕심을 내면서 숨을 내지르다 보면 어느 순간 풍선은 빵 터져버립니다.
그러면 1등은커녕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합니다.
손자병법과 함께 중국 양대 병법서로 불리는 오자병법에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 번 이긴 자는 큰 해를 입고, 네 번 이긴 자는 피폐해지며, 세 번 이긴 자는 패자(覇者)가 되고, 두 번 이긴 자는 왕이 되지만 한 번 이긴 자는 황제가 된다.”
전쟁은 이길수록 좋은 것인데 많이 이길수록 망한다니 이 무슨 소리일까요?
전쟁은 지는 자는 물론이고 이기는 자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불러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불필요한 싸움을 피해야 하고, 결정적인 한 번의 전쟁에 전력을 다해 승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야고보서 1장15절 -
욕심은 무언가를 바라거나 얻고자 하는 마음을 뜻하며, 한자로는 '慾心'으로 표기합니다.
'慾' 자는 '바랄 욕'을 뜻하는 '欲'에 '마음 심'을 합쳐 의미를 강조시킨 글자입니다.
헬라어에는 욕심에 대한 단어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ἰα)로 '더 많은'을 뜻하며,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의미합니다.
두번째는 에피두미아(ἐπιθυμία)로 '정욕', 또는 '탐심'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라디아서 5장24절)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탐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명사 에피뒤미아(ἐπιθυμία)는 에피뒤메오(ἐπιθυμέω)라는 동사(달려있다, 갈망하다, 욕정이 타오르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에피뒤미아'가 인간의 마음이나 인간 그 자체 그리고 인간이 행하는 것이나 원하는 것을 가리킬때는 욕심, 탐심, 사욕, 정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이나 진리를 가진 성도가 주어가 되어 사용될때는 '원함'(눅22:15, 살전2:17)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누가복음22장15절)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데살로니가전서2장17절)
이것은 기본적으로 '원함'이라는 것이 죄인인 인간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원함이 없는 자(죽은 자)가 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욕심이요 탐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버린 인간의 실존입니다.
반면에 원함의 주체인 예수님이 원하는 것은 그가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욕심은 지나쳐도 문제가 되고 없어도 문제가 됩니다.
적당한 욕심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동기부여가 됩니다.
장래희망도 자신의 욕심을 말한 것입니다.
우월 의식도 일종의 욕심인 셈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지나치면 탐욕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의 욕심이 속에 생기면 벌써 그 다음부터는 전체가 삐뚤어집니다.
죄는 삐뚤어진 것입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합니다.
하말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을 맞추지 못하다’의 의미를 가진 하말타노(ἁμαρτάνω)의 명사형으로 ‘과녁을 맞추지 못함’입니다.
죄 때문에 생각이 삐뚤어집니다.
죄 때문에 소원도 삐뚤어집니다.
죄 때문에 비판도 삐뚤어집니다.
죄 때문에 평가도 삐뚤어집니다.
죄 때문에 주장도 삐뚤어집니다.
이처럼 죄 때문에 완전히 다 삐뚤어집니다.
“죄가 장성한즉” 이 말은 '죄가 차차 커진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이든지 병이 들면 그 사람 병이 자꾸 커져. 암병이 들게 됩니다.
암세포, 그놈이 자꾸 장성해지면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병든다고 금방 죽지 않습니다.
병 하나가 들면 약해져 병이 둘 생기고, 셋 생기고, 넷 생기고 자꾸 병이 생깁니다.
온 몸에 병이 여러 가지가 생기면서 합병증이 되어 결국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아마도 아버지의 재산을 형이 독차지 한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간청은 공명정대한 분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탐욕을 보셨습니다.
공명정대한 분배라는 이름을 내세워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는 욕심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보다 형제간의 사랑이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보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 형제에게 명해서, 유산을 나와 나누라고 해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 누가복음 12장13∼15절 -
음식을 너무 과하게 먹으면 배탈이 납니다.
너무 적게 먹으면 배가 고픕니다.
적절히 먹어야 합니다.
학은 천년을 산다고 해서 새해 연하장에 나오는데 학은 항상 위장의 70%만 채운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혹시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을 꼭 움켜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평안!
'묵상과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이야기 (0) | 2024.12.29 |
---|---|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시느니라'(Where Love Is, There God Is Also) (0) | 2024.12.23 |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2) | 2024.11.17 |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이 잘 되어 갑니다." (0) | 2024.10.20 |
앉은뱅이 햇살 한 줌을 손에 쥐고 걸어오는 할머니! (0) | 2024.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