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아비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자리에 앉겠습니까?

가족사랑 2024. 4. 27. 01:53

강효석(姜斅錫)이 1926년에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야사집에 간택(揀擇)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간택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혼인을 치르기 위해 여러 사람의 혼인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족 및 궁인들이 나아가 직접 보고 적격자를 뽑던 행사였습니다.

간택은 1759년(영조35년) 6월 창경궁 명정전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조선(朝鮮)영조 35년 왕후(王侯)가 세상(世上)을 뜬지 3년이 되어 새로 왕후(王侯)를 뽑고자 하였습니다.  

영조는 부왕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王妃)를 책봉하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정식 중전간택을 통해 새 왕비를 간택하기로 하였습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처녀 20명이 뽑혀 간택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 서울 남산골 김한구(漢耉)의 열다섯살 난 딸도 있었습니다.

 

-  정순왕후 송씨 진영 定順王后 眞影 -

 

드디어 간택시험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으라!"

임금의 분부에 따라 처녀들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방석을 찾아 앉았습니다.

그런데 김씨 처녀만은 방석을 살짝 밀어놓고 그 옆에 살포시 앉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 이상하여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김한구의 딸이 대답했습니다.

"아비 이름이 여기에 있는데 어찌 감히 자리에 앉겠습니까?"

임금이 문제를 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깊은 것은 무엇인가?"

혹은 산이 깊다 하고, 혹은 물이 깊다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김한구의 열다섯 살 난 딸은 홀로 대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제일 깊은 줄로 아옵니다."

임금 영조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김한구의 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물건의 마음은 예측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다른 문제를 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꽃이 제일 좋으냐?"

혹은 복사꽃이, 혹은 모란이, 혹은 매화가 좋다 하여 대답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김한구의 딸은 홀로 "목화가 가장 좋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임금 영조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김한구의 딸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꽃은 일시적으로 좋지만, 오직 목화는 옷으로 천하사람들을 입혀 따뜻하게 하는 공이 있습니다.”

 

때 마침 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능히 월랑의 기와 수를 셀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니다.

※월랑(月廊) : 궁궐, 절 따위의 정당(正堂)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모두 손가락으로 1, 2, 3, 4를 셌습니다.

김한구의 딸은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몇 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임금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로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임금 영조가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채색의 무지개가 궁궐 안에서 일어나 김한구의 딸이 세수하는 그릇으로 들어가니

왕후의 덕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간택하였습니다.

이 간택으로 김한구의 딸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66세의 왕 영조의 계비가 되었고, 그가 정순왕후(貞純王后)입니다. 

계비(繼妃: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대동기문』:「이사관탈초구헌정순왕후(李思觀脫貂裘獻貞純王后)」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글입니다.

[至王后十五歲己卯 貞聖王后喪期已盡 英廟親臨揀擇 聚集士大夫女子於宮中 后獨避席而坐 上聞何避也 后曰父名在此 安敢當席而坐 盖揀擇時 書其父名於方席之端故也]」

[上問衆女子 何物最深 或言山深 或言水深 衆論不一 后獨曰人心最深 上問其故 對后曰物心可測 人心不可測也 上又問何花最好 或言桃花 或言牧丹花 或言梅裳花 所對不一 后獨言曰棉花最好 上問其故 對曰 他花不過一時之好 惟棉花衣被天下 有溫煖之功也]」

[時適雨下滂沱 上曰能數月廊瓦行也 皆以手指數一二三四 后低頭況默而坐 對曰其行也 上曰何以知之 以數簷溜故 知之也 上瞿然異之 其翌朝 彩虹自闕中起 揷於后盥洗器 以其有后之德 特揀正宮]」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잠언 1장 7절 -

 

지식(知識/ knowledge)과 지혜(智慧/ wisdom)는 얼핏 같거나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입니다.

'지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사물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능력'입니다.

지식은 '인식과 이해'의 범주이고, 지혜는 그 지식을 활용하기 위한 '처리 능력'입니다.

보통 지혜가 지식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와 지식은 따로 떨어뜨려서 딱 구분해놓을 수 없는 영역입니다.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은 자기 만의 특유한 삶의 체험적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넘어져보지 않고 빠른 시간에 성공한 사람들은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딜레마를 탈출하거나 복잡한 문제를 순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혜는 부족합니다.

똑똑한 전문가,  책상 지식으로 무장한  인재들은 양산되고 있지만 이들에게 체험적 교훈으로 터득한 삶의 지혜는 부족합니다.

지식은 직선적으로 축적되지만 지혜는 곡선적으로 우회 축적됩니다.

지식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지만 지혜는 삶에서 직접 체험을 통해 몸으로 익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지식은 학교교육의 결과이지만 지혜는 평생을 통해 분투노력해서 얻은 체험적 깨달음이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의 겉모습만 봅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사람의 보이지 않은 이면을 보는 혜안입니다.

우여곡절( 迂餘曲折)의 삶을 살면서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경험하고 곡선적 사람을 살아온 사람은 사람의 외모만 보지 않습니다.

 인상을 보고 관상을 보며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굴곡을 읽어냅니다.

고속으로 축적된 직선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하고 겉으로 일어나는 파도를 보고 대처합니다.

그러나 다양한 성공과 실패를 겅혐하면서 곡선적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파도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이면의 힘을 읽습니다.

곡선적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의 얼굴에 담긴 굴곡을 읽습니다.

적당한 여건이 조성되고 각자 노력하면 지식은 얼마든지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남을 배려하고 조건 없이 베풀고자 하는 ‘휴머니즘’이 어우러져야 그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큰 스님의 동안거(冬安居)를 따라온 동자승이 물었습니다.

※동안거(冬安居) : 음력 11월 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겨울 3개월을 선원에서 화두 정진하는 수행

“스님, 긴 겨울 동안 면벽수도 하실 건데 오늘 하루만이라도 방을 따뜻하게 해 드릴까요?”

“허허 그놈, 어차피 때가 되면 입적할 몸인데 차고 따뜻한 것이 그게 뭔 대수냐?”
당장 입적하지는 않겠으나 하루를 호강하면 그 이후가 더 괴롭고 불편할 뿐이고 굳이 편안함을 찾자면 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다는 큰 스님의 말씀입니다.

적당한 고통과 어려움,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이른바 인내야말로 사람의 그릇(크기)과 사고를 더욱 크게 한다는 깊은 지혜로부터의 가르침입니다.       

 

잠언 1장 7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 즉 퍼즐이 들어있습니다.

※퍼즐(Puzzle)이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출제자의 문제를 풀어가는 놀이를 말한다. .

잠언 9장 10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퍼즐도 성경에 있고, 그  퍼즐을 맞추는 법도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이심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심을 믿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17장3절 -

 

무엇을 안다, 또는 누구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배우고 익히는 일은 보람도 있고, 성취감도 줍니다.

좀 더 많이 아는 것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지식을 '진리의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나침반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그는 인생의 방향감각을 모르고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그는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의미없이 그냥 살아갑니다.

그는 어떤 것이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인생에게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 해도 짐승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상식과 교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살아갈 때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갑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저주의 길에서 떠나 축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그것이 아니라면 오래 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오래 살려고 하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가진 이 삶의 터전인 눈에 보이는 세상을 세상과 세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혼인하기 전에 천사가 와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1장34절)

즉 남자와 자신이 상관이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누가복음1장30∼34절)

성경이 말하는 <안다>라는 것은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고, 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생은 몸이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일이 바로 자기의 삶이 되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와 상관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영원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 생명의 지식은 학문적인 지식뿐만이 아닌 참되고 인격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장2223절)

사도 바울은 주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으며 그 지식을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연결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립보서 3장1011절)

성경은 영생을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모종의 시간적 연장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누리지 못할 것이라면 영생은 이미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있는 상태가 곧 영생입니다.

이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인격적 앎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함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앞서거나 뒤쳐진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빠르거나 느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가졌거나 덜 가진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