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 였습니다.”

가족사랑 2024. 5. 27. 23:45

늦은 밤 시골버스 안.

신작로를 따라 천천히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 아기가 엄마 품에서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덜커덩하며 요동치는 바람에 곤히 잠들었던 아기가 깨었습니다.

아기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그치겠지'

그러나 아이는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아기는 정거장을 세 곳이나 거쳐 갈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버스 안에서 아기의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던 승객들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의 짜증스런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줌마! 아기를 좀 잘 달래 봐요!”

“아줌마, 버스 전세 냈어요?”

“아줌마,  버스에서 내려 걸어 가세요!"

"아줌마,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얼른 내려요!"

“와, 정말 짜증나 죽겠네!"

버스에 탄 승객들이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에게 온갖 험한 말을 퍼붓고 있을 때였습니다.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췄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무슨 일이 생겼나? 의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들의 눈이 버스 기사에게 꽂혔습니다.

버스 기사가 문을 열고 내렸습니다.

버스 기사는 곧장 길옆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들고 버스로 돌아왔습니다.

버스기사는 승객들을 제치고 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우는 아이 입에 초코렛을 물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습니다.

 

이후 버스는 아무런 일이 없었듯이 다시 출발했습니다.

그제까지 화를 내고 짜증을 냈던 승객들이 부끄러워 쥐죽은듯이 조용해졌습니다.

서너 정거장을 지나자 아이 엄마가 버스기사에게 다가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손등에 다른 한 손을 세워 보였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뜻의 수화였습니다.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와 함께 내렸지만 버스기사는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버스기사는 어두컴컴한 길 위로 아이 엄마를 위해 자동차 불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몇몇 승객들이 버스기사의 행동에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버스 안에 있는 승객 모두 함께 큰 박수로 버스기사를 축복했습니다.

버스 기사의 따뜻한 초코렛으로 달빛을 따라 천천히 달려가는 버스 안에는 훈훈한 마음들이 함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 위의 이야기는 지인의 카톡을 통해서 얻은 글을 편집했습니다.

원저자는 노자규 작가입니다. 노자규 작가는 네이버 블러그「노자규의 골목이야기」를 통해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7절 -

 

 

<보우그>라는 마을에 '우고린'이란 본성이 착한 곱추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고린의 어머니는 주정뱅이여서 '소랑케'라는 누이의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살았습니다.

그의 누이 소랑케가 어느 날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석방되었으나 직장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불구인 동생이 병석에 눕게 되자 그녀는 몸을 팔아 동생의 약값을 대었습니다.

어느 날 우고린은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조롱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고린을 넘어뜨린 그들은 춤을 추면서, "네 누이의 연인들이 각각 한 프랑씩 지불했다."라고 조소하며 외쳤습니다.

그때 그 동리의 나이 많은 신부가 와서 그들을 물러가게 하고 우고린을 구해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곱추는 모멸감과 치욕을 참을 수 없어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누이 소랑케도 동생을 뒤따르듯 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 늙은 신부는 "이 어린것들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사회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비통하게 말합니다.

그들 남매의 장례식 때 많은 사람들로 교회가 꽉 찼습니다.

신부는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통곡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여! 생사의 주관이신 주님께서 심판 날 나에게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셔도 나는 주님께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네 양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다면 나는 부끄럼을 무릅쓰고 '그들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리떼 였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반 파센(Pierre Van Paassen)’의 작품 중, ‘우리 시대의 날들(The days of our years)’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 피에르 반 파센(Pierre van Paassen, 1895-1968)

 

긍휼(矜恤)은 불쌍히 여겨서 도와 주는 마음입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은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은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남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거나 자비를 베풀면 손해를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남에게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면 바보처럼 취급받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냉정한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쌍한 감정을 억제해야 하며, 표독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요즘 신앙인들에게 긍휼은 단지 종교적 용어에 불과합니다.

세상 현실 속에서 바리새인들처럼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살아갑니다.

긍휼은 단지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정죄하고 매장하며, 해치는데 익숙합니다.

 

긍휼은 영어로 컴패션(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함께 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m'과 고통을 뜻하는 'passion'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긍휼은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지각의 차원에서 공감하는 것을 넘어 그에 따르는 행동을 취한다는 실천적인 공감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矜恤)은 헬라어 엘레에오(ελεεω)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동정심, 자비, 불쌍히 여김, 구제, 친절, 은혜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그 궁핍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이런 행위들이 다 긍휼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행위는 용서해 주며, 위로해 주며,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치유해 주며, 회복시켜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3장21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편103편12~13절)

 

하나님은 넘치는 긍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심각한 고통인 죄로 말미암는 죽음을 동일하게 느끼시고 대신 당하신 긍휼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긍휼의 지식만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긍휼의 실천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향해 하시는 모든 행위의 동기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통로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그들도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정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장89절)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죄인을 향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긍휼은 ‘연약한 사람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내 곁에 연약한 사람이 있는 이유는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십시오.

함께 눈물을 흘리십시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함께 나누고 도우십시오.

그러면 내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는 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는 자가 있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임합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