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네바다 (Nevada) 주 사막 한 복판을 ‘멜빈 다마’라는 한 젊은이가 낡은 트럭을 몰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햇볕이 내리쬐는 사막 한복판을 걸어가는 허름한 차림의 한 노인을 발견하고 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멜빈 다마는 차에서 내려 노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어르신, 어디까지 가십니까? 날이 너무 덥습니다. 타시죠, 제가 태워다드리겠습니다.”
노인은 '라스베이거스(LasVegas)'로 간다고 말했고, 멜빈 다마는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노인이 고맙다며 내리려고 했습니다.
멜빈 다마는 안쓰러운 마음에 25센트를 건네주며 차비에 보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참 친절한 젊은이로구먼, 명함 한 장 주게나!"라고 했습니다.
멜빈 다마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노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명함을 받아든 노인은 “멜빈 다마! 고맙네! 이 신세는 내 꼭 갚겠네."
나는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이라네”라고 말하고는 갈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이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무렵, 믿기 어려운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세계적인 부호 하워드 휴즈 (Howard Robard Hughes) 사망!’이라는 기사와 함께
하워드 휴즈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사, 방송국, 비행기 회사, 호텔, 도박장 등 50개 업체의 회장, 억만장자(億萬長者)였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1960년대 미국에서 손꼽히는 갑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유산의 16분의 1을 “멜빈 다마”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이 유언장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멜빈 다마”란 사람이 누구인지 도대체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유언장 뒷면에 휴즈가 적어 놓은 멜빈 다마의 연락처와 함께,
자신이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친절한 사람이란 소개의 메모가 있었습니다.
멜빈 다마는 라스베이거스 인근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하워드 휴즈 유언장 사건으로 유명해진 이 일화는 1967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멜빈 다마는 그 후 이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1968년 하워드 휴즈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전 재산의 16분의 1을 이 친절한 젊은이에게 주겠다는 유산에 대한 유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위를 따지지 않은 친절은 25센트의 기적으로 되돌아 온 것입니다.
1960년대 당시 하워드 휴즈의 유산은 15억 달러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금액을 지금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6조8천억 원 이상입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에베소서 4장32절 -
친절(親切, kindness, Χρηστος )
친절은 아무 자본 투자 없이 최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무형자산입니다.
친절은 고객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 만족도를 향상시키고 조직의 서비스 평가를 좌우하는 기본척도입니다.
친절은 고객들의 내면을 자극시켜 끝없는 기쁨을 안겨 주고 친근감을 가지게 만드는 묘약이 됩니다.
친절은 마음의 여운을 간직하여 진심을 담아 베풀 때 큰 효과가 나타납니다.
친절이 행해지는 곳은 항상 웃음이 넘쳐흐르고 포근한 인간미가 싹터 얼굴 붉힐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친절은 사람의 감정을 다스려 감동을 안겨주고 호감을 갖게 만드는 부메랑과 같은 것입니다.
옛 성인인 노자는 “말로 친절을 베풀면 신뢰를, 창조하고 생각으로 친절을 베풀면 깊이를 획득하고, 주는 것으로 친절을 베풀면 사랑을 낳는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친절을 상술로써 이용합니다.
친절을 훈련하여 상품을 파는 수단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친절은 물건을 잘 팔기 위한 상술이 아닙니다.
친구를 잘 사귀기 위한 좋은 매너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친절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본을 보이신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만들어 내는 삶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성령의 열매 9가지 중에서 '자비'(慈悲)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자비'는 헬라어로 '크레스토스(Χρηστος)'라고 합니다.
미국의 킹제임스(KJV) 성경에는 이 단어가 gentleness(온유함 혹은 관대함)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엔아이비(NIV) 성경에서는 kindness(친절함)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 특별히 긍휼이 필요한 작은 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개역개정(한글)은 '자비'로 번역했지만,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두 '친절'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습니다.
'친절'은 헬라어 원어인 '크레이토스'의 본래의 의미인 '선함'과 '친절함'에 제일 가까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세상에 보여주는 핵심단어입니다.
선하고 착하게 사는 모습, 관용과 인자, 친절을 베푸는 모습, 겸손과 온유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이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입니다.
제자 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모습을 인자한(χρηστός)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삶으로 표현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누가복음6장35절).
어떤 인간이라도 인자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처럼,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χρηστός(크레스토스)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인자하시다"( χρηστὸς ὁ κύριος) 라는 진리(벧전 2:3)를 맛보았기에, 이제 세상에서 사는 모습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삶으로 이해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1세기 말과 2세기 초의 로마의 역사가나 관리들, 시민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함과 부드러움, 온유함, 사랑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종교적 오해와 선입관이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의 친절함(크레스토테스 χρηστότης)을 보고, 기독교인들이 믿는 그리스도(Christus)를 라틴어로 크레스투스(Chrestus, Χριστός)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친절한 분(Chrestus)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친절하고 젠틀(gentleness)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취한 태도는 바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에 바빴습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비교적 좋은 옷을 입고 특별한 존재임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린내 나는 어부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세리와 같은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했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한 이 땅에 내려오신 것 자체가 친절을 베푸신 것입니다.
마치 왕이 평복을 입고 지나가다가 배고파하는 어린아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왕이 낮은 자리에 내려오지 않고서 어떻게 친절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친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자들은 낮은 태도를 갖습니다.
비록 자신은 고귀한 신분이고 부자라 할지라도 기꺼이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친절은 인심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인색하게 베푸는 것은 친절이 아닙니다.
친절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거나 사무적인 관계에서 친절하기란 쉽습니다.
가식적으로도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친절이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 특히 가족처럼 거의 매일 대하는 사람일수록 친절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대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위장된 모습만 보지만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은 볼 것 못 볼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허물없이 가까운 관계라는 것은 동네 개구쟁이가 냇가에서 서로가 벌거벗고 노는 관계와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머리가 커지고 자기주장이 개입되면서 판단의 개입되기 시작합니다.
죄의 본성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판단이 앞서고 허물을 들춰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가까운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친절은 상대방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헌신은 내가 쓰고 남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남으면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돌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목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먹이기 위해 내가 원하는 아름답고 편한 장소가 아니라 언덕을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다녀야 합니다.
더욱이 게으르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양 떼를 떼어놓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눈이 어두운 양 떼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양 떼와 같은 자들을 보살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위해 헌신하신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로새서 3장23절)
그리스도인의 친절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친절하십시오.
아내에게도 친절하십시오.
남편에게도 친절하십시오.
상사에게도 친절하십시오.
부하 직원에게도 친절하십시오.
이웃에게도 친절하십시오.
유대인들은 '친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들은 2세들에게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나는 내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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