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부활절-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가족사랑 2024. 3. 30. 01:08

- 요한복음 20장19 〜 31절 -

 

언제나 즐거움과 기쁨으로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단골손님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언제나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니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봐요.”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걱정 근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내게도 고통스러운 일, 짜증나는 걱정거리가 생긴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매일 즐겁게 사실 수가 있어요?”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산답니다.”

“3일의 비밀이라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3일의 비밀이란,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그 문제를 해결하시도록 맡겨버리고 조용히 3일을 기다리는 것이라오.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그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3일이면 족하다오.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 같은 고난이 와도

3일 후면 언제나 광명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게 늘 즐겁기만 하지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높은 지위와 권세를 누린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평안을 누리며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도 진정한 평안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평화를 잃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죄를 범하자 제일 먼저 잃은 것이 하나님과의 평화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려고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평화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지은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평화만 깨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로 만들어 평화를 누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과 평화가 깨지자 부부 싸움이 시작 되었습니다.

서로가 자기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하며 싸웁니다.

이렇게 평화가 깨진 인류역사는 끊임없는 전쟁과 불화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의 욕심과 사람의 죄악이 반복되었습니다.

 

분쟁은 지금도 쉬지 않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평화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평화를 파괴해 왔습니다.

이처럼 죄를 지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화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평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1. 평강-샬롬(שָׁלוֹם)

 

요즘음 교회에서 "샬롬"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멘, 할렐루야 등의 단어와 함께 우리말처럼 흔하게 쓰이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카톡에도 많은 분들이 ‘샬롬!’으로 인사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샬롬(שָׁלוֹם)"이란 단어는 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샬롬은 우리말 ‘안녕’이나 영어 ‘hi’에 해당됩니다.

<샬롬>은 ‘행복’ '성공‘ '행운’ 등과 같이 실제적인 삶과 관련되어있습니다.

‘샬롬’은 신체적 건강을 의미합니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편38편3절)

샬롬은 질병의 치유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예레미야 6장14절)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이사야38장17절)

샬롬은 번영과 형통을 의미합니다.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신명기23장6절)

"그의 귀에는 무서운 소리가 들리고 그가 평안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이르리니"(욥기15장21절)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시편35편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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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샬롬!’으로 인사하셨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누가복음24장36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한복음20장19절)

사도바울 역시 ‘은혜와 평강’이라는 인사말로 대부분의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평안, 평강, 평화라고 번역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자연스럽게 나누는 인사말입니다.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사무엘상25장6절)

 

히브리어 "샬롬(שָׁלוֹם)"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ιρηνη)"라고 합니다.

"에이레네"도 '샬롬'과 같이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제자들을 둘 씩 둘 씩 짝지어 전도대로 파송하시면서 ‘샬롬’을 말씀하셨습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누가복음10장3〜6절)

 

"샬롬"이라는 단어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문에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는 축복기원 세 가지 있는데 마지막은 ‘평강’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 민수기6장24〜26절 -

 

'샬롬'은 제사장의 기원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비롯하여 하나님 백성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규명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평안’ 혹은 ‘평강’ 등으로 번역되는 ‘살롬’의 어원적 의미는 ‘온전함’(wholeness)입니다.

‘살롬’(שלום)과 같은 어원이면서 ‘샬롬’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히브리어 동사에 ’실람‘(סיל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동사는 ’물건 값을 지불하다‘ 혹은 ’빚을 갚다‘라는 뜻입니다. 즉, 물건 값을 지불함으로 거래관계가 완결되는 것이 ’살롬‘입니다.

이처럼 ‘샬롬’은 돈을 주고받는 거래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은 타인과의 상호 관계성을 갖고 있으면서 부분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통전적 개념임을 보여줍니다.

‘샬롬’이 사용된 성경 용례에서 그것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도 빠짐이 없다는 숫적 온전함에 샬롬을 사용했습니다.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예레미아13장19절)

공정한 저울추에 샬롬이 사용되었습니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신명기25장15절).

모자람 없도록 넉넉하게 준 삯에도 샬롬이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기2장12절).

‘샬롬’은 ‘전쟁’ ‘적대감’ 등의 반대 개념인 ‘평화’ 혹은 ‘우정’을 의미합니다.

‘샬롬’은 분쟁이나 갈등이 해소된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그 범위로는 개인관계로 시작하여 보다 큰 범위의 국제관계까지 망라됩니다.

좋은 우정관계의 친구들을 ‘샬롬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보라 곧 유다 왕궁에 남아 있는 모든 여자가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갈 것이요 그 여자들은 네게 말하기를 네 친구들이 너를 꾀어 이기고 네 발이 진흙에 빠짐을 보고 물러갔도다 하리라”(예레미야38장22절).

주변 국가와 더불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국가적 안녕을 누리는 것을 ‘샬롬’이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열왕기왕4장25절).

‘샬롬’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확장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의 언약을 ‘평화의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54장10절).

‘샬롬’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과 관련된 전인적이면서도 통전적인 복 개념입니다.

‘샬롬’은 은혜와 함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시는 가장 중요한 복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빌어주는 축복기도(민수기6장24〜26절)에서도 은혜와 함께 ‘샬롬’은 복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은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근거라면, ‘샬롬’은 그런 은혜 속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샬롬’의 복보다 더 우선적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정립되어야 ‘샬롬’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요한복음 20장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두렵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가만둘 리 없습니다.

언제 갑자기 들이닥쳐 죽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공포가 밀려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집에 모여 대문이고 창문이고 문이란 문은 모두 닫아걸고서는 일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만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두려움 속에는 자신들이 이제까지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무기력한 죽음과 사라져버린 희망에 대한 허무함이 있습니다.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했어야 되는데, 스승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배신하고 도망쳐 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는 19절의 말씀은 단지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문만이 아니라, 공포과 절망, 어둠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있는 제자들의 닫혀 버린 마음의 문도 가리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문을 닫고 있던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 가운데 들어서셨습니다.

닫힌 문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방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장애물도 주님의 출입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에게는 그 어떤 장벽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닫힌 문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에 이르는 문이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10장9절)

이처럼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기절초풍했을 제자들에게 건네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개역개정)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새번역, Friede sei mit euch!)

“Peace be with you!"(영어 NIV)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때도 샬롬(평안)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요한복음14장27절 -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안을 주셨습니다.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강’을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 또는 평화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늘에 나타난 천군 천사들이 노래한 찬양의 내용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2장14절)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하늘에서 들려 온 이 평화의 찬양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인사말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평강은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꿰뚫는 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최후 최종의 적, 죽음을 이기신 분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평강의 인사를 건네신 주님은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두 손과 옆구리에는 십자가의 상처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구멍 뚫린 두 손과 창 자국으로 깊이 패인 옆구리, 그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와 물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극한의 고통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고난의 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는 것은 당신이 매달리신 십자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상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표시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표시입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를 보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확인했습니다.

죽음의 흔적이 부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이제 기쁨으로 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3번씩(19절, 21절, 26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왜 예수님께서 3번씩이나 ‘샬롬!’이라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샬롬'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평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려움 속에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침통해 있는 제자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진정한 평강이 충만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평강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두려움으로 불안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 땅에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어렵습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어렵습니다.

학생은 학생대로 살아가는 것이 살얼음 밟는 것 같은 위태로운 삶의 나날입니다.

아이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립니다.

연예인들이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합니다.

사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인생을 알만한 여든의 노인들이 극단적 선택으로 자식들의 가슴에 못을 박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강이 없어서입니다.

평안이 없어서입니다.

샬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이때 마음에 불안과 초조, 좌절과 절망,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목자는 결코 양을 사망의 골짜기에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낭떠러지 인생길로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목자 되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시편23편 -

주님은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생명과 광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지팡이로 건저 주시고 막대기로 원수를 쳐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집도 필요합니다.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명예도 필요합니다.

권력도 필요합니다.

인기도 필요합니다.

학벌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평안이 없이 돈만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빼앗긴 채로 인기가 많아지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상실해 버린 채로 권력을 잡고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명예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평안은 삶의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평안 또는 평강으로 번역된  샬롬은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축복입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에게 '샬롬!'하면 ‘행복하게 잘사세요’는 의미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에게 '샬롬!'하면 이기고 돌아오라는 의미입니다.

환자에게 '샬롬!'하면 쾌유를 빈다는 말입니다.

어부에게 '샬롬!'하면 만선하고 돌아오라고 것입니다.

시험을 치는 학생에게 '샬롬!'하면 시험 잘쳐서 합격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오시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똑같이 하실겁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 평강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실 수 있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마지막 하신 말씀은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의 왕좌에 모시어 들이십시오.

그리고 평강이 넘치는 성령 충만한 평안의 삶을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평안!

- 2024년 부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