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가족사랑 2024. 1. 27. 20:08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빌립보서 4장1113절 -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갑자기 땅값이 오른다던지, 복권이 당첨되어 거부가 된 사람들 소위 졸부가 된 사람들이 갑자기 생긴 돈을 주체하지 못하고 추한 모습으로 형편없는 행동을 보이며 살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며 사는 사람을 보곤합니다.

또한 부자였다가 갑자가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감당하지 못하고 엉망진창의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곤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가난하고 궁한 형편이지만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놀라운 평정심을 유지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그저 돈이 없다는 핑계로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봉사하며 즐겁게 삽니다.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는 삶의 방식을 터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가난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견디었고 부자가 되어 그 부를 만끽하며 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난할 때도, 부자일 때도 그 때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식으로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주어진 일에 몰두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불만스러운 것이 아니라 약간 불편할 뿐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처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며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잊지 않고 즐겁게 일할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삶의 원동력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능력 주시는 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터득한 자족의 비밀이었습니다.

그는 상황적으로 어려운 적이 있었으나 도리어 그 상황은 그에게 자족의 비결을 가르쳐 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이로써 자족(自足)의 능력을 구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중 자족 (自足)을 설파한 대표적인 인물로 고린토에 살았던 디오게네스(BC412~BC323)를 들 수 있습니다.

 

 

디오게네스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고린도 바닷가에 세워진 동상을 통해 내려오고 있습니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혜자를 찾는 중 디오게네스를 찾아 왔다고 하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자족을 잘 보여줍니다.

알렉산더가 말했습니다.

,디오게네스여, 나는 일찍이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소. 묻건대,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디오게네스가 말했습니다.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볕을 가리지 않게끔 옆으로 조금 비켜서 주시면 됩니다.”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이란 말은 당시 헬라문화에서 최고의 덕목이었습니다.

“지족하는 마음” 또는 ‘자족’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입니다.

이 합성동사의 어근 동사는 ἀρκέω(아르케오)로  "충분하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여기에 재귀대명사 αὐτός(아우토스)가 앞에 붙어 합성어로 αὐτάρκεια( 아우타르케이아 )가 되었습니다.

"그 자체로 만족하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라는 기본 뜻을 지닙니다.

외적 의미로 "충분히 갖다" "소유가 적절하고 충분하다"는 뜻이 있습니니다.

내적 의미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더 욕심내지 않는 마음입니다.

자족(아위타르케이아, αὐταρκεία)은 스토아학파의 도덕상 최고의 목표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말로 인간이 모든 물질과 모든 사람들에게서 무조건으로 완전하게 초연한 정신 상태와 인간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태도에 의한다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충분하여 흡족하고 만족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즉 모든 욕망을 절제하고 그로 인하여 주어지는 가치와 의미로 최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토익(Stoic) 학자들은 이 자족은 ‘절제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덕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족은 많 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적게 내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부한 인간이 누구냐고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이다. 그 이유는 자족이야말로 자연의 부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즉 두 경우 별개의 것으로 각각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비천한 상황에서도! 풍부한 상황에서도!”

즉, 외적환경과 상관없이 그때마다 적절한 삶의 방식을 그는 터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족(自足)이란 적당하게 주어진 형편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족이란 어떤 형편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자 감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잠언 30장8절에 아굴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 말씀은 적당한 중산층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서 마땅히 행할 바 온전한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는  사도 바울의 자족의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에 의해 전능하신 주님과 연합함으로써, 어떤 형편에든지 주님 안에서 지족할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3장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인간은 대부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행복이나 감사하는 마음은 늘 한 발짝씩 멀리 있음을 보곤 합니다.

마치 다가서면 더 멀어지는 신기루(mirage)와 같이 행복과 감사는 늘 조금만 나아가면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있을 뿐, 정작 행복하지 않으며 감사치도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고 확신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감사와 기쁨의 말씀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만족을 모르는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욕구불만 가운데 불평과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족할 줄 모르고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만족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1장27-28절)

성자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장10절)

성령께서도 우리 신앙인들에게 풍부한 삶과 능력있는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이 불행에 울며 탄식하며 괴로워하며 저주스럽게 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수많은 문제에 해답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그것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소원이든지 이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부른 것이 배고픈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거나 방종하게 하지 않듯이 배고픈 것도 나를 비굴하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벤자민 슈몰크(Rev. Benjamin Schmolk, 1672-1737) -

 

찬송가 549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는 신앙인들이 즐겨부르는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은 슈몰크(B. Schmolck)이라는 독일 목사님이 화재로 두 아들을 잃고 지은 찬송시입니다.

 3절에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처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 목숨에 자족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슈몰크(B. Schmolck) 목사님이 어디서 이런 배짱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을까요?

그에게 현재의 어두운 상황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에게 두 아들을 화재로 잃은 엄청난 고통이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재의 비극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천성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더 큰 미래, 천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비극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도 바울!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도 오직 예수,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풍성한 삶을 살앗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 어떤 환경속에서도 풍부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매맞고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말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