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어머니의 믿음이 나를 키웠습니다"

가족사랑 2024. 6. 15. 06:00

1967년 경남 진해에서 해군 장교 아버지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다섯 살 때 백내장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을 정도로 시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일곱살 여름방학 때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큰 외상이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부모는 너무 어리다 보니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겨울방학 때 쯤 아이가 물건을 눈에 가까이 대고 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병원에 갔는데 의사의 진단이 기존의 백내장으로 인해 눈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와 눈에 큰 충격으로 시신경을 다쳤다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해서 바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눈을 고치려고 삼 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수술을 했지만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다가 열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뛰어노느라 집에 붙어 있지 않던 개구쟁이였던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자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였습니다.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집에 있던 전축(지금의 오디오)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자 귀가 트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이에게 음악에 흥미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다니던 부산맹학교에는 풍금 한 대밖에 없어서 음악을 하기에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4학년 때 서울로 이사해 서울맹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서울은 부산에 비해 교육 환경이 좋았습니다.

아이는 거기서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5학년 때에는 학교에 현악 합주부가 생기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이 아이는 6학년 때쯤 라디오에서 아름다운 음을 들었습니다.

기숙사 형들에게 ‘이 악기 이름 아느냐?’ 고 묻자 형들이  ‘클라리넷’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밴드부에 들어가며 클라리넷을 하겠다고 졸라 클라리넷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밴드부 악기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선생님께 말씀 드려 밴드부 악기를 빌려서 아침저녁으로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모님께 몇 달을 졸라 중학교 3학년 때 개인 클라리넷을 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지휘자 로린 마젤의 프랑스 국립관현악단 내한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모아 놓은 용돈을 다 털어 1만 2천 원짜리 공연티켓으로 세종문화회관 3층 맨 뒤 둘째 좌석에 앉았습니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7번이 연주되었습니다.

그는 클라리넷 음색이 너무 아름다워 그 순간 클라리넷을 공부하겠다고 확실하게 진로를 결정했습니다.

 

 

그가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반대를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특수교육학과에 진학을 해서 안정적인 삶을 꾸려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맹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대학에 가려면 혼자서 많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입시 준비를 위해 레슨을 받았지만 점자 악보가 없어서 선생님이 연주해 주면 멜로디를 외워 가며 공부를 하였습니다.

 

대학에 입학을 할 때는 시각장애 때문에 원서조차 받아 주지 않는 대학도 있었습니다.

합격을 하고서도 불합격의 위험에 처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앙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했고, 4년 후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중앙대 음대를 마친 그는 시각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가르치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해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동생과 둘이서 영한사전을 가져다 놓고 끙끙대면서 대학원 원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1991년 가방 4개를 들고 혼자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 대학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 3대 음악대학인 피바디 음악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6년에 조기 졸업했습니다.

그는 1997년 국내는 물론 미국 피바디음악대학 150년 사상 최초로 시각장애인이 관현악 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 논문을 썼던 마지막 6개월 동안 그는 하루 2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었습니다.

수면 부족으로 환청까지 들렸지만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이겨 냈습니다.

그는 장애인은 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편하니 미국에 머무르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1997년 귀국을 했습니다.

 

그는 중앙대학교, 총신대학교, 한세대학교, 숭실대학교에서 음악강사로 강의하고 계원예고에서도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교수 임용이 되기를 고대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귀국한 것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지만 대학은 냉소적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받은 가장 큰 선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린 것입니다.

부인은 시각장애인도서관에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깊었습니다.

부인의 내조 속에 그는 사회 활동을 왕성히 할 수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재능이 있는 시각장애 음악인들이 공연 기회를 갖지 못해 좌절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시각장애 연주자들은 악보를 보지 못해 월급을 주는 관현악단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 음악인들로 구성된 세계 유일의 오케스트라인 ‘하트시각장애인체임버오케스트라’를 2007년에 결성했습니다.

 

 

그의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는 2011년 10월과 2015년 두 차례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졌습니다.

특히 2011년 10월 27일 뉴욕 카네기홀 공연은 그야말로 대박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공연은 카네기홀 개관 120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무대 카네기홀은 개관 이후 처음으로 공연장 불을 모두 끄는 암전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시각장애연주자들이 보조단원들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고 악기를 들고 자리를 잡은 뒤에 무대와 객석 모두 어둠으로 물들었습니다.

지휘자도, 악보도 없이 ‘하나 둘 셋 넷’ 구령 이후 2시간 동안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 등 14곡이 연주됐습니다.

조명이 다시 켜지자 관객 600여 명은 일어나 4차례 박수를 보냈고 이들은 3차례 앙코르 연주를 했습니다.

어려움 속에 성사된 카네기 공연은 미국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시각장애인 13명과 비장애인 8명으로 모두 21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7년 7월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가진 창단연주회 이후 지금까지 400여 회에 이르는 공연을 했습니다.

 

2019년 5월8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019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은 매년 어버이날을 맞아 자녀를 훌륭한 예술가로 키워낸 부모를 기리기 위해 제정됐습니다.

그 수상식 자리에서 그는 클라리넷으로  ‘어머니 은혜’를 연주했습니다.

어머니 조묘자 여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 시각장애인 이상재 나사렛대 음악학과 교수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공부하고, 자신이 동분서주하며 뒷바라지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이상재 교수는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뭔가 하고 싶다고 하면 온 힘을 다해 뒷바라지해주셨습니다.

음대에 간다고 할 때도, 혼자 유학 간다고 할 때도

‘너라면 할 수 있다!’면서 언제나 믿어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믿음이 나를 키웠습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입니다.”

 

- 이상재 교수 -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마태복음 15장 21∼28절 -

 

여자는 약하지만 아내와 어머니는 참으로 강합니다.

아내는 집안의 태양이므로 "안 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편이나 자녀들은 집에 들어오면 아내와 어머니부터 찾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머니를 보면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 외쳤습니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외침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녀를 안심시켜 떠나보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떼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이때 그 여자가 나와서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가나안 여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딸을 향한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은 감동입니다.

가안안 여자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딸을 귀신에서 해방시키고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예수님께 칭찬 받고 귀신 들린 딸을 고칠 수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한 능력으로 자식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그 어머니를 보고 싶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