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강해

산상수훈 강해(2)-마카리오이! 애통하는 자

가족사랑 2021. 1. 1. 16:38

마카리오이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 2절 -

 

 

오늘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남의 슬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의 재난이나 불행을 보고 내일처럼 슬피 우는 자들일까요?

아니면 부모나 형제를 잃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에 애곡하는 자일까요?

물론 그들도 애통하는 자입니다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우리는 크게 애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분명 고귀한 눈물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홉 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오늘 나온 애통은 그 강도나 농도에 있어서 최상급의 슬픔입니다.

οἱπενθου̑ντες(호이펜둔테스)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앞에 놓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의 애통을 표현할 때 썼던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영혼의 굶주림을 느끼는 자가 토하는 거룩한 탄식을 애통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심령이 가난하게마음과 영혼을 비운 후에는 반드시애통이 따라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그냥 은혜로운 덕담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가 남을 위해 운다고 해서 나에게 천국 문이 열릴까요

내가 아무리 부모님을 위해 울고자식을 위해 울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내게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남의 아픔과 상처 때문에 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운다고 해도 그 눈물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은 누구를 위한 애통이겠습니까?

바로 나를 위한 애통입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도 불쌍해서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때문에 슬피 우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거짓과 이기심과 부족함을 바라보며 애통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신과 불신을 통회하며 우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0장에 나오는 히스기야왕의 애통을 들어 보십시오.

 

히스기야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곧 병들어 죽게 될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의사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우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왕하20:3) 사망선고를 받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엎드려 통곡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질병 앞에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절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믿음으로 산 것을 근거로 생명을 연장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이 여호와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들을 기억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죽게도 하실 수 있지만 자신을 낫게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는 선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절망 밖에 없어서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자가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는 사람그가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1. 예수님의 애통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세 번 우셨습니다.

한 번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예수님의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는 영생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예루살렘성을 바라다보시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19:41) 예수님께서 우신 것은 표현한 단어로 누가는 클라이오(κλαιω, klaiw)’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음과 관련이 있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주님께서 그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리를 내어서 통곡하셨습니다

굉장히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통곡하셨을까요

당신 자신이 이제 일주일 후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슬퍼해서 고통스러워서 우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이 죄 값으로 고통과 죽음을 당하는 것을 바라보시면서 불쌍해서 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을 바라보시면서 불쌍해서 우셨습니다

그분의 눈물은 멸망이 임박한 민족을 바라보시면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찰스 피니 목사님은 어느 날 시카고에 집회하려 왔다가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라고 묻자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라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성도는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위해 애통해야 합니다.

 

2. 애통의 위로(慰勞)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던 배신자 베드로의 애통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펄쩍뛰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했습니다(26:31∼35)

그런데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군병들에게 끌려갔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습니다베드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함께 도망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궁금했습니다숨어서 예수님이 끌려간 대제사장 뜰 앞에 숨어들었습니다그런데 한 여종에게 신분이 노출되었습니다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말했습니다순간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다른 곳으로 피했다가 또 발각되었습니다이렇게 그 날 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그런데 마침 닭이 세 번 운 것입니다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26:75)했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베드로는 어둠의 세력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그는 가슴을 찢으면서 통곡하며 회개를 했습니다베드로는 유다처럼 연약하여 주님을 배반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 자리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그때에 베드로의 회개는 철저했으며이 사건은 평생 동안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부활 후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그리고 세 번을 물었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고 그에게 내 양을 치라고 제자의 지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주님의 위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벽을 바라다보고 심한 통곡과 눈물을 쏟아내었던 히스기야왕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 주셨습니다.

 

질병 중에 있습니까

의사와 현대 의약품을 의지하십니까

물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을 받으십니다

회개한 자를 다시 사용하십니다.

여러분도 용서받고 다시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애통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날마다 불행하다고만 여깁니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한숨만 내쉽니다

힘들어 죽겠다고 탄식만 합니다

병들어 아프다고 염려만 쌓아갑니다.

 

영혼이 병들었습니까

인생이 답답합니까

질병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울면 삽니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제발 도와달라고제발 고쳐달라고제발 살려달라고 애통하면 삽니다

그렇게 울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습니다

위로라는 어원의 뜻은 파라칼레오(παραχαλεω)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파라(παρα)라는 말과 칼레오(καλεω)라는 두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 뜻은 '곁으로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위로는 곧 하나님께서 자기 곁으로 불러주시는(call)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며 흘리는 눈물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1:23).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위로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몸으로 사시면서 위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제 완전한 위로를 주시려고 <보혜사 성령님-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ετος)>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제는 죄를 철저히 미워하고 이로 인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는 하늘백성들에게 성령이 함께 계셔서 위로하심을 주십니다.

 

우리의 슬픔과 아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주님은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병을 치유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복된 약속과 보증권면으로 실망과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게 함으로 위로 하십니다(히 6:18; 15:4). 

실망과 절망으로 힘을 잃은 우리에게 힘을 돋우고 격려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불안에 대해 안심하라는 인사와 평안을 주심으로 위로하십니다(14:27, 16:33).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기쁨화해의 기쁨주님과 친교의 기쁨우리 앞에 있는 영광의 기쁨과 기대영원한 상태에 대한 소망에서 오는 기쁨 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가장 큰 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 천국에서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7:16∼17).   산돌

- 강릉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