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5)
마카리오이!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7절 -
로마인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면 살리고 마음에 들지 않고 나약하게 보이면 죽일 권리가 있었습니다. 로마인 남편은 원하면 아내를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수하에 있는 종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도 같이 마음대로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당시의 유대인들 역시 로마인들처럼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교만했고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비난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내세워서 죄를 범한 자들을 적발해서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는 무자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못을 이해해 주고 용서해 주고 자비를 베풀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그들로서는 이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잘못한 사람은 처벌을 받아야 하고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십시오!
옛날보다 인권이 많이 보장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하고 힘이 없다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과 상관이 없이 타인의 잘못에 의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제도나 환경 잘못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이런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자비나 긍휼의 마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사해서 폭로해야 자기들이 살아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총리나 장관 청문회 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조사를 잘 하는지 몇 번 이사를 했는지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 재산을 얼마나 가졌는지 사생활은 어떤지 다 조사해서 조금만 이상이 있으면 폭로를 하고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친구의 약점이나 부족함을 이용해 친구를 자기 수족같이 부리면서 괴롭힘을 주어 결국은 자살까지 이르게 합니다. 연이어 일어나는 학생들의 자살 소식 뒤에는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 악마의 심성을 가진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1. 긍휼이란 무엇인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웃의 아픔이나 연약함에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합니다.
오늘 성경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긍휼(矜恤)이란 말은 ‘가엾게 여기고 동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자기의 일처럼 가슴 아파하며 동정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이 특정한 방향을 정해놓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마음과 행위를 말한다고 한다면,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처하여 있는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며 자선을 베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긍휼은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여서 도움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긍휼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눅10:30~37).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몹시 매를 맞고, 가진 것을 다 빼앗긴 채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차례로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평소에 늘 어려움을 당한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는데, 무슨 까닭이었는지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아무런 긍휼을 베풀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살려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다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어렵고 힘든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길 뿐만 아니라, 그를 살려 내라고 하신 것입니다.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긍휼입니다.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헬라어 엘레에오(ελεεω)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동정심, 자비, 불쌍히 여김, 구제, 친절, 은혜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그 궁핍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이런 행위들이 다 긍휼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행위는 용서해 주며, 위로해 주며,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치유해 주며, 회복시켜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시편 103편에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103:12~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긍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 이후에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에베소서 2장에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절)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생각하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고 진노를 받아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에, 그 인자와 긍휼하심이 무궁하시기 때문에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살아남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노력을 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향해 하시는 모든 행위의 동기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통로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짐을 지고서 고난당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신 것처럼 고난당하는 사람과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위스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꾸민 ‘버스’라는 제목의 뮤지컬 드라마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한 시골에 마을버스 기사가 새로 이사 왔습니다. 이 마을버스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전시장입니다. 성격이 판이한 마을 사람들의 애환과 수다가 버스 안에서 왁자지껄하게 펼쳐집니다. 어느 날 마을버스에 다섯 명의 승객들이 타고 마을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리막길이라 도저히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로 가는 길은 낭떠러지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곡예 하듯이 마을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짚더미가 있습니다. 그 짚더미를 버스가 받으면 무사합니다. 그런데 그 짚더미 앞에서 한 어린이가 놀고 있습니다. 그 짚더미를 놔두고 그냥 가면, 계속되는 내리막길에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마을버스 기사는 다섯 명의 승객과 짚더미 앞에 놀고 있는 아이, 어느 쪽을 살려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했습니다. 버스 기사는 짚더미를 들이받았고 버스는 짚더미를 받고 멈췄습니다. 다섯 명의 승객들은 기사를 비난하면서 내렸습니다. 아이가 버스에 치어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리고 보니 짚더미 앞에서 놀다가 희생된 그 아이는 바로 그 버스 기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버스 기사는 자기 아들을 희생하고 다섯 명의 승객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외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함으로써 저와 여러분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긍휼입니다.
2.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그들도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빚진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나라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수백억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평생 갚을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부채를 탕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탕감 받고 나오는 길에 자기에게 불과 몇 백만 원의 소액을 빚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 빚 독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돈이 없어 갚지 못하자 그를 고소하여 감옥에 보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주인은 그를 다시 불렀습니다.그리고 그를 책망하고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이 땅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지만 긍휼을 입고도 긍휼을 베풀지 못하면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떨며 구걸을 했습니다. 프란시스는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 춥다고 대답하자, 그는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거지에게 입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계속해서 떨면서 프란시스에게 옷을 입어도 추우니 나를 꼭 안아 주실 수 없느냐고 다시 요구합니다. 이 거지는 문둥병 환자였습니다. 프란시스는 병이 옮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진심으로 그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꼭 끌어안았던 그 거지가 뜻밖에도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어서 “네가 이처럼 나를 사랑하는 것을 이제 알았다”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이후로 그는 부잣집 아들로서의 상속을 다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전도자가 되고 유명한 성 프란시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법칙은 정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8~9)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죄인을 향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함께 아파하십시오. 함께 눈물을 흘리십시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함께 나누고 도우십시오.
그러면 내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는 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는 자가 있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이 임합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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