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4)
마카리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미테복음 5장 6절 -
어떤 목사님이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칼국수 집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사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상당수의 손님들로 가득했습니다. 칼국수와 왕만두를 맛있게 먹고 나오면서 카운터에서 계산하려고 하는데, 카운터에 노트북 컴퓨터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생각하기를 ‘아, 저 노트북에는 그날의 매상이나 매출이 기록되어 있거나 구체적인 금전출납의 내용이 있나보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노트북 컴퓨터가 칼국수 집에 왜 필요합니까?’ 그랬더니 주인인 듯한 사람이 자연스럽게 경영상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경영상 왜 필요합니까?’고 물었더니, 그 주인이 설명하기를 컴퓨터를 통해 계절적 변동과 요일 날씨에 따른 매상의 변화에 대한 데이터들이 있어서 그날의 매상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음식의 양을 조절하여 재고를 남기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음식의 신선도를 높일 수 있고, 맛있게 만들 수 있고,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 칼국수집이 음식점으로서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음식점이 잘 되려면 몇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음식이 맛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식당이 깨끗해야 합니다. 셋째는 종업원들이 친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합리적 경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그 칼국수 집은 잘 되는 요건을 갖춘 식당이었습니다.
그날 그 목사님은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저 식당 주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저토록 노력하고 합리적으로 일하고 있는데 나는 ‘영혼의 식당’인 교회를 섬기면서 최소한 저 식당 수준은 되는가?”, “나는 교회의 영적 부흥을 위해 합리적 수고를 하고 있는가?” 이 목사님은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보고 사는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구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애쓰며 고생하며 수고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번창교회에 부르셨는가?”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등등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올바른 삶을 위해서 바른 물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구하며 사느냐에 따라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욕망(lust)을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이 원하는 대로 욕망과 쾌락을 좇아서 사는 동물적인 사람입니다.
둘째는 필요(need)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집짓고 사는 의식주 문제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당장 필요한 것만 추구하는 물질 추구의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의미(meaning)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성적 지식과 판단에 따라 바른 길, 가치 있는 일, 보람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사는 철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자기 절대화, 자기 독선, 자기 과시, 자기 교만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의(justification)를 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기초로 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뜻을 좇아서 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주의 뜻을 분별하여 거룩하고, 인격적이고, 영원한 것을 좇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네 종류의 사람 중 어떤 사람에 해당합니까?
여러분은 지금껏 무엇을 구하며 살았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은 하나님나라를 바로보고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이 세상에서 무엇을 우선적으로 구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기 보다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팔복의 결론은 예수 잘 믿는 존재가 되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팔복 중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1. 의(義)란 무엇인가?
‘의’(義)라는 헬라어는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υνη, dikaiosyne)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공의(justice)’ 혹은 ‘정의(righteousness)’라는 말입니다.
법적인 단어로 법을 잘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미덕을 뜻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될 때에 ‘디카이오쉬네’는 언약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백성들에게 개입하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심으로 자기 백성의 구원하심을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2~3절)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지적과 같이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곧 인간의 의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열심히 지키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고, 소득의 십일조를 구별해서 바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기는커녕 혹독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7~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를 의미합니다. 의에 관한한 인간적인 기준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의’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는 헬라어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망가진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보면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처럼 관계가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욕심에 따라서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천국 시민답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그리고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불교는 자비를 근본이라 하고, 유교는 효를 근본이라고 합니다.
불교나 유교에는 의의 개념이 희박합니다. 의보다 자비가 먼저고, 의보다 효도가 먼저입니다.
샤머니즘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무속신앙에 무슨 의가 있습니까?
기독교 외에는 의를 논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의’란 오직 생명의 종교에만 있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의를 말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으로부터 정의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의’는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움이며 소망입니다.
2.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상태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주리고 목마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경험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거나 마실 물이 없어 숨이 넘어갈 정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은 당장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갈증을 말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상태는 죽을 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유튜브에서 북한 탈북자 증언(이해주)을 보았습니다. 북한에서 2002년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하는데, 친구의 딸을 잡아먹고 그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여 그 아버지는 혼절해서 죽었다는 이야기,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 장마당에서 같이 장사하는 여성이 납치되었는데 가보니 그 사람이 인육을 먹으려고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파서 사람을 잡아먹은 것입니다.
굶주림과 목마름은 경험이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름날에 목이 심하게 탈 때는 소의 발자국에 고인 물과 논바닥의 물이라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달게 마실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리는 것과 목마른 것’은 당장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당장 물을 마시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갈증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며칠 동안 굶은 후에 밥 한술, 채소 한 잎, 물 한 컵 마실 때의 기분을 알고 계십니까?
체면도 없고 친구, 가족도 돌볼 겨를도 없이 한 조각, 한 방울까지라도 차지하려는 그 굶주림과 목마름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말씀은 굶어죽어 가는 사람이 음식을 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물을 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의를 행하여 백절불굴하고 악과 싸우며 모든 고난을 이기고 정의를 세워 완성하려고 애쓰며 모든 조롱과 압제와 훼손 중에서도 정의를 단념하지 않는 자. 이런 사람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마카리오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떠나는 것을 전송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3~25).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로움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하나님은 ‘의인 오십을 찾으면 이 성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끈질긴 요구에 의인 열 명만 찾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단 한 사람의 의인이 없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찾으십니다.
3.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에 도달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주 그리스도 예수는 선언하십니다.
“복이 있도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행복 중에 배부름의 행복은 기본이고 영원한 행복입니다.
시대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해서 있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행복이 사람에게는 배부름의 행복입니다.
‘의’는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목사가 무저항, 비폭력의 시위를 하면서 워싱턴 링컨 동상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산을 토막내어 희망의 이정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흑인과 백인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오래된 흑인영가를 함께 부르는 날이 오는 꿈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것입니다. ‘마침내 자유를 얻었네, 마침내 자유를 얻었네, 전능하신 주님의 은혜로, 마침내 우리는 자유를 얻었네!’”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에게 진짜 ‘마카리오스’가 있습니다.
실제 그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변화나 환경에 따라 요동치는 기쁨이 아닌,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충만한 기쁨이며, 슬픔이 지우지 못하는 기쁨이요, 죽음까지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에서 매순간 샘솟는 그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면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어서도 안 됩니다.
거짓말로 속여 폭리를 취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왕따 시켜서도 안 됩니다.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감사와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무익한 일을 만나게 될 때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목마르고 허기져 있습니까?
잡히지도 않고, 멈추게도 할 수 없는 것들에 소망을 두십니까?
주님을 매일 매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을 기억하시고 그 일을 이어받으십시오.
자신의 무능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연약함을 아는 겸손으로 이웃에게 다가서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갈증과 허기는 다 사라지고 그것으로 이미 배부를 것입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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