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25)-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가족사랑 2023. 3. 2. 12:47

로마서 강해(125)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이 은혜는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로마서 15장 16절 -

 

성경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를 A.D. 56~57년경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며 내걸었던 정책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였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제국이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편리한 용어였습니다.

서기 1세기에 대부분의 황제들은 평화를 숭배하는 가시적인 기념물을 세웠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는 것과 같은 의식으로 평화를 선전했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였습니다.

평화는 제국의 동의어가 되었으며, 로마제국이 야만적인 속주민에게 평화와 문명을 전해준다는 의미에서 제국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팍스 로마나', 또는 '로마의 평화'는 로마 제국이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을 최소화하면서 오랜 평화를 누렸던, 1세기와 2세기경의 시기를 말합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체적으로 기원전 27년에서 180년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팍스 로마나'는 피지배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관용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황제를 숭배한다는 조건에서였습니다.

 

로마는 글라우디오 황제(A.D. 42~54년)때 전도를 금지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이후 아굴라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이주서와 천막깁는 직업을 가진 바울과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를 보면 글라우디오 황제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추방합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사도행전 18장2~3절)

아마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로마인들과 함께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이유때문에 전도를 포기하지 않아 결국은 로마에서 추방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 중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로마는 당시 귀족과 특권층에게는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노예들과 도시 빈민들에게 아주 비참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도시의 빈민들과 노예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은 이 복음으로 무척 큰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형편에 처해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과 은혜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더우기 고린도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며 동족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던 경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16절은 그런 맥락에서 바울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제사장이라는 단어를 같이 써서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福音)”이라는 말과 “제사장(祭司長)”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공의를 세우는 직무로 백성들이 죄를 범한 했을 때 짐승을 가져 오게 하여 그 짐승을 비참하게 죽임으로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죄를 범한 인생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1. 구약의 제사장(祭司長)

제사(祭司)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사전적인 의미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정성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성경에 나오는 제사란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해 짐승의 피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교에서 제사장직은 레위지파 사람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직분입니다.

임명에 의해서 이루지는 직분이 아니라 혈통으로 말미암은 직분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번제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제단으로 온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로 아론(Aaron)이 속하였던 레위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일을 맡았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나병(한센 병) 환자를 가려내는 일을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민사 또는 형사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장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의 주된 업무는 매일 드려지는 희생 제사를 주관하는 일이었습니다(민수기 28장3~8절).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물의 기름을 번제단 위에 불살라 향기로운 연기를 올립니다.

제물의 가죽과 모든 고기와 내장, 제물 전체를 불태웁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그 일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28장을 보면 제사장의 옷은 열두 가지 보석으로 장식했고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명품 옷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그렇게 입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희생 제물인 수송아지(양, 또는 염소)를 제사장 앞에서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피 흘려 죽였습니다.

제물을 바친 사람은 가죽을 벗기고, 그 제물을 여러 부분으로 자르면 제사장은 불타고 있는 제단 위에 짐승의 머리와 기름과 잘려지고 각을 뜬 고기(Fresh)를 올려놓으면서 태움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본다면 제사장의 하는 일은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시기, 간음, 폭력, 사기, 도둑질, 위증 같은 지저분한 죄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과 죄인들에게 뿌린 후 제물을 불에 태웁니다.

비록 제사장들은 빛나는 성전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지만, 실제 현실은 죄냄새, 피냄새, 살타는 냄새를 맡으며 죄와 용서, 타락과 거룩, 생명과 죽음사이를 오가며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라 부르는 헬라어의 의미는“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히브리어로 코헨(כהן)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라틴어)로는  폰티펙스 (Pontifex)’, 영어로는 브릿지 빌더 (Bridge Builder)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구약 시대의서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역할을 했습니다.

중보자(仲保者)였습니다.

'중보'(仲保)는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둘 사이에서 화목의 일을 주선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은 죄 때문에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바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로 가는 다리를 놓아 주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제사(祭司)를 통해서입니다.

제사장은 소나 양, 염소등 짐승을 잡아서 죽이고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워서 죄를 속합니다.

그러면 죄가 사하여져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직분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어도 제사장이 없이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가 아무리 똑똑해도 심지어는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 왕 때에 나라가 강성해졌습니다.

이때 왕이 교만해졌습니다.

웃시아 앙은 제사장 없이 자신이 혼자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하고자 했습니다.

제사를 자신이 집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문둥병에 걸렸고, 결국에는 그 문둥병으로 죽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 역대하 26장 16~21절 -

 

제 아무리 큰 업적을 남긴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보자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아론의 아들들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인 아론의 아들들에게 거룩한 옷을 지어 입히고 제사장 직분을 맡기셔습니다(출애굽기 28장1∼2절).

그렇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사람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2. 신약의 제사장- 복음의 제사장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레위지파가 아닌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모든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짐승을 잡고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우는 제사가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께로 가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good news)을 뜻하며 헬라어 유앙겔리온’(ευαγγελιον, 사자가 전해 주는 기쁜 소식)에서 유래했습니다. GospelGod spell의 줄임말로.  ‘하나님이 하신 축복의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복음’(福音)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 즉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구원의 소식’입니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바 되었고, 바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류를 죄로부터 구출해 주시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복음’이라 하고, 구약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비춰주면서 그 내용들을 ‘복음’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죄를 짓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죄 없는 예수님을 보내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으며 영생을 소유한 자가 됩니다.

즉,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복음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제사장

어떤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십니다.

천국백성이 되게 해 주십니다.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복음의 제사장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  베드로전서 2장 5절 -

 

신약시대 교회의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는 달리 신약시대, 즉 교회 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신령한 집'이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지었던 성막이나 성전 같은 집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전처럼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한 집을 세우고 신령한 집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성막을 세우고 성막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막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다윗에게 임한 계시를 따라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이 그들의 모든 사람의 최우선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도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세우고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성전 건축과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은 우리들에게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비유며 그림자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신령한 집인 성전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짓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일 큰 영광으로 생각을 하면서 성전예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 그 성전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헤롯성전을 보시면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성전이 바로 자신의 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라고 하시면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과거 구약시대 때는 성전을 건축하고 거기에 하나님을 모셨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베도로 사도는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하는데 단서조항을 달았습니다.

그것은 '산돌같이'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산 돌'이란 살아있는 돌, 즉 리빙스톤(living Stone)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다니엘 2장에 보면 “뜨인 돌”이 나옵니다.

뜨인 돌이란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돌이라는 뜻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는데 다니엘이 그 꿈과 해석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이 뜨인 돌이 등장을 합니다.

왕이 꿈에 거대한 신상을 보았는데 그 머리는 정금이고 가슴과 팔들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철이고 발은 얼마는 철이고 얼마는 흙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사람의 손으로 다듬지 아니한 뜨인 돌이 나타나서 그 신상을 부셔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우상은 온데 간 데가 없어지고 우상을 친 돌이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뜨인 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물을 나오게 했던 그 반석, 이 세상나라들을 부셔버렸던 그 뜨인 돌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돌이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베드로전서 2장4∼-5절)라고한 것은 아마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돌도 보통의 돌이 아니라 '산 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처럼 돌에 비유한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메시야이십니다.

이것은 목마른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풀어주실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돌은 생명체가 없는 무생물이지만 예수님을 돌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생명이 있는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린바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따라다니던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쳐 주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는 구름떼처럼 벌떼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옷을 벗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고 호산나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하고 반겼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을 때부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되겠다고 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그 곁을 떠나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싫어하고 나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것도 절대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구원, 천국, 영생, 이런 말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처음 오셔서 가르치셨던 그 재미있는 이야기, 병이 치유되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다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예수 믿어 축복 받은 것만이 훌륭하고, 성공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호화스럽게 살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귀하게 여김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인정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기 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지 않는 일이라고 하면 세상에서의 영광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로 하나님을 영원히 섬길 수 있는 그 분의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동물을 죽여서 드리는 희생 제사는 드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서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친히 제물이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선포하는 일에 우리의 몸과 영혼을 “신령한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