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22)-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가족사랑 2023. 1. 4. 07:59

로마서 강해(122)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 로마서 15장 5∼6절 -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이 그 사람의 진짜 품성이다.”라고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품성(品性)은 ‘품격과 성질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품성은 일반적으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말, 행동, 태도를 통해 표현됩니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독특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환경과 문화, 전통 가운데 성장하면서 훈련되고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 품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품성은 사람마다 갖는 독특한 성질 중에서 반복된 삶의 패턴 속에 비교적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특성 또는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품성’과 함께 ‘성품(性品)’이란 표현을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품(性品)이란 ‘사람의 성질과 됨됨이, 성질과 품격’을 의미합니다.

보통 '성품'을 높임말로, '성격(性格)'을 예사말로,'성질(性質)'을 낮춤말로 쓰는 데 이런 것들을 통털어 다 성품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성질을 고쳐가면서 사는 생물입니다.

그래서 성질이 성격도 되고, 성품도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라면서 성격이 완성됩니다.

급하거나 느리거나, 혹은 외향적이거나 내향적으로 표현됩니다.

성격은 한옥이나 양옥처럼 이미 만들어진 마음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격이 급격하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노력에 의하여 성품을 바꿀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고 정진하면 마음의 품격이 올라가고, 그 끝까지 도달한 분들을 성현(聖賢)이나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고대 의사의 전형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그는 이전 학파의 생각을 정리하여 시행해보고, 환자를 치료한 것을 기록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만든 것을 통해 치료 의학의 발달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는 의사의 윤리 등에 대한 선서문으로, 희생 · 봉사 · 장인 정신이 담겨져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는 사람의 체내에서 분비되는 체액에 따라 4가지 기질로 분류하였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4체액설을 정리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정액이나 자궁의 체액에서 탄생하고 자라나는 점을 근거로 이를 중요시했으며 따라서 액체가 생명의 근원일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혈액(blood), 담즙(bile), 점액(phlegm) 그리고 물(water, 나중에 흑담즙을 언급)의 4가지 체액으로 인간의 병리를 설명하였습니다.

 

-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년-370년) -

 

이것을 기초로 사람들을 기질론으로 평가하였습니다.

피색이라 하여 ‘다혈질’, 끈끈한 액체라 하여 ‘점액질’, 담즙 중에서도 누런 색 의 담즙이라 하여 ‘황담즙질 또는 담즙질’, 검은 색의 담즙이라 하여 ‘흑담즙질 또는 우울질‘로 분류하였습니다.

이 기질론은 19세기까지 사람들의 기질을 평가하는 방법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의 기질론을 전 유럽에 보급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엠마뉴엘ㆍ칸트’입니다.

 

- 엠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20세기에 들어서며 ‘프로이드’의 등장으로 이 기질설은 자취를 감추는 듯 싶었으나 현재에 와서 또 다시 대두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기질검사 방법으로 DNA 기질검사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 세포가 5~6조 개인 것을 생각할 때 1개의 세포를 분석을 하여 그 세포를 코드로 구분하여 인쇄를 했을 경우 A4용지 3천장의 분량이라 합니다.

그러니 잘 맞는다 하는 ‘DNA기질검사’도 그 많은 용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어떤 성품을 가지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이신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정확하지 않은 사람의 생각보다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여러 다른 이름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알도록 도와줍니다.

 

엘로힘(Elohim, אלהים) : 창조,  전능하시고 강하신 하나님. 강한 자, 신적인 존재 (창세기 1장1절)

아도나이(Adonai) : 주, 주인, 여호와(YHWH) 대신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 (출애굽기 4장10-12절)

엘 엘리온(El Elyon) : 가장 높은 자, 가장 강한 자 (창세기 14장20절)

엘 로이(El Roi) :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전능자 (창세기 16장13절)

엘 샤다이(El Shaddai) : 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장1절)

엘 올람(El Olam) : 영생하시는 하나님(창세기 21장33절), 영원한 하나님 (이사야 40장28절)

야훼(YHWH, Yahweh)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 (출애굽기 3장13-14절)

여호와 사바오트 (Yahweh Sabbaoth) : 만군(군대들)의 여호와(사무엘상 1장3절)

여호와 마카데쉠 (Yahweh Maccaddeshem) : 너희를 거룩케하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31장13절)

여호와 라아 (Yahweh Raah) :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편 23편1절)

여호와 삼마 (Yahweh Shamma) : 여호와는 거기 계시다(에스겔 48장35절)

퀴리오스 (Kurios) - 주(主), 주인(누가복음 1장46절)

소테르 (Soter) : 구주, 사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누가복음 2장11절)

데오스 (Theos) - 하나님,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말하는 보통명사(눅 1:47, 요 20:28, 딛 2:13, 벧후1:11)

 

하나님은 영원이시고 그분은 시작과 끝이 없으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영원히 멸하지 않고 무한합니다 (신명기 33장27절; 시편 90편2절; 디모데전서 1장17절).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심 즉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말라기 3:6; 민수기 23:19; 시편 102:26, 27).

하나님은 비교 될 수 없는 분입니다.

그 분이 하신 일을 따를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하시고 그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무엘하 7:22;시편 86:8; 이사야 40:25; 마태복음 5:48).

그분은 신비하고, 심오하시며, 찾아낼 수 없고, 지나간 과거의 것을 찾으면 하나님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이사야 40:28; 시편 145:3; 로마서 11:33, 34).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오늘 읽은 로마서 15장 5절에서는 하나님의 인내와 위로의 성품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하나님은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헬라어로 인내는 휘포모네(ὑπομονῆς)'인데,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의미합니다.

이 인내는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휘포모네’의 인내라고 선언합니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데 있어서 많은 희생과 고난이 따릅니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은 한두 번으로 되지 않습니다.

희생적 도움을 인지하지 못하기도 하고 스스로 힘이 없어서 일어서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담당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아픔이 따르게 되는데 그 처절한 아픔 속에서도 견디는 인내(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고 그가 수없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자격을 이룰 때까지 30년을 기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창세기 12장1-2절 -

 

벧엘에서 야곱에게 축복하시고 수없는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 자격을 이룰 때까지 20년을 참았습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창세기 28장14-15절 -

 

요셉에게 비전을 주시고 수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20년을 기다렸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 창세기 37장5-7절 -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베드로후서 3장8절 -

 

하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의 고통과 괴로움을 종식시킬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괴로움을 화내지도, 조급해 하지도 않고 참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잘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래 참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는 아브라함의 오랜 기다림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앞당기려고 시도해 보았거나, 또는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처럼 또 다른 해결책으로 대체하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은 성취 대신 슬픔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른 성취를 기다리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때문에 왕위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를 향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기를 기다렸스빈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행동을 취하지 않고 대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편 40편1-2절)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대한 조급증과 싸우고 있습니다.

여전히 포기하고 싶고, 또는 내가 직접 뭔가를 해 버리고 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의 충고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브리서 6장12절)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궁극적인 사건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매순간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장20절)라고 외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 니다.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사람들이 죄와 실수와 잘못으로 인하여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있을 때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 아내를 누이라 속이므로 위기를 당했을 때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 위로해 주셨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속이므로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이 섭리하여 좋은 삶을 살게해 주셨습니다.

요셉이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해서 위기를 당했을 때 섭리하여 살게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을 고난 가운데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는 피상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인간이 주는 위로도 피상적이고 일시적입니다.

인간의 위로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이 참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이나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진정한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파라클레시스'(παρακλησιs)는 어원이 성령의 별명인 보혜사의 원어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s)와 같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인내하고 위로하시는 것을 친히 실행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것들을 알게 하여 우리를 위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16장13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한복음15장26절)

뿐만 아니라 직접 그 위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8장26-27절)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위로가 극대화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지만, 세상의 환난도 계속 우리에게 엄습해 옵니다.

그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세상의 환난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완전한 위로만이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장3~4절)

천국은 눈물이 없는 곳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안아주시고 모든 눈물이 씻어주십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위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는 지지하고 격려하고 기쁨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가 자신에 대한 자세라면 위로는 대상자에 대한 자세입니다. 

연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그의 약점에 대해 위로하고 격려하여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약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근거로 위로하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과 목적과 섭리를 근거로 격려하므로 소망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약한 자도 소망 가운데 확신을 가지고 내적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특권을 받은 우리는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만 위로받는 것으로 끝내시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책임을 부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위로의 역사는 마치 릴레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로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또 위로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큰 위로로 가득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와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를 가질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심정을 갖고 자신보다 다른 지체들을 기쁘게하며 먼저 존경하며 섬기며 받아주며 그리스도와 같은 생각을 품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