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24)-소망의 하나님

가족사랑 2023. 1. 5. 21:38

로마서 강해(124)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 로마서 15장13절 -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프레드릭 왈츠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에는 한 여인이 참담한 모습으로 비파를 가슴에 안고 지붕 위에 혼자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이 여인의 눈은 수건에 가려져 있어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지붕 위의 하늘은 해도 달도 없는 어두움 밤에 오직 하나의 별만이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를 비쳐주고 있습니다.
그녀 가슴의 일곱  줄의 비파는 이미 여섯 줄이 끊겨져 있습니다.
그녀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외롭게 홀로 앉아 아직 남아 있는 한 줄로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비추는 단 하나의 별빛,

단 하나의 비파 줄과 눈은 수건으로 가려져 앞을 보지 못하는 여인은 절망하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조지 프레드릭 왓츠(George Frederic Watts, 1817~1901)이 그림의 제목을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 George Frederic Watts(조지 프레드릭 왓츠, 1817~1904)의  '희망 Hope',1885년캔버스에 유채, 142.2 x 111.8 cm)'-


'미국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의 정치적 성공 뒤에는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인기 화가이자 조각가인 조지 프레드릭 왓츠(G F Watts·1817~1904년)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정치 초년 시절,  왓츠의 1885년작 '희망'(Hope)에서 미국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는 지구본 위에서 한 줄 악기로 연주하는 작품에서 미국정치 변화시킬 '담대한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오바마의 담임 목사인 제레미야 라이트가 1990년 버지니아 연설에서 미국사회의 '희망'을 역설하며 언급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라이트 목사는 둥근 모형의 지구본 위에 앉아 한 줄을 제외하고 모든 줄이 끊어진 리라를 연주하는 이 그림 속의 여인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믿음과 희망의 '아이콘'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의 연설 내용을 메모해뒀다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를 인용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오바마는 왓츠의 그림에 대해 "여성에 대한 편견과 탐욕,인종차별,소외층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끝까지 음악 연주를 해내려는 그녀에게 '대담한 희망'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 점의 그림을 통해 누구에게나 소망의 줄이 끊어질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정치적 역할도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자서전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홍수원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도 털어 놓았습니다.
런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된 왓츠의 '희망'은 지구본 모형 위에 젊은 여성이 홀로 앉아 한 줄밖에 남지 않은 리라로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 이 그림은 미술평론가들이 '절망'이라고 제목을 붙였으나 왓츠가 '희망'이라고 고집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햇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달빛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음조를 맞추어 주는 비파의 줄들이 끊어지는 경험도 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사랑하던 아내나 남편, 혹은 자녀의 줄이 갑자기 끊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인생의 줄이 끊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마음의 중심을 잃고 방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수백 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심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3년 6개월 동안 멈추었던 비를 내리게 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 사람도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즉시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아합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 열왕기상 19장 1-4절 -

 

두려움과 절망은 누구에게든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위대한 종 엘리야에게도 다가올 수 있고 나에게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단 하나의 줄이 있습니다.
영원이 꺼지지 않고 불타는 불씨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모든 두려움과 절망, 낙심과 불안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영혼의 삶에도 시련이 다가오고 세상 생활에도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사업상 어려움이 다가오고 대인관계에서도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부부간에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어려움이 생깁니다.

또, 육신이 병들고 허약해지고 고통스러운 일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현장에는 끊임없이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이상은 이러한 고통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다음 가는 곳마다 가시넝쿨과 엉겅퀴가 나고 질병과 고통으로 괴로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세상의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염려, 근심, 불안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시편 91편 1∼6절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정치적인 광풍이나  경제적인 광풍을 만납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염병과 같은 광풍이 불어옵니다.

하룻밤 새에 지진으로 40,000여명이 죽은  튀르키예와 시라아 같은 비극이 닥쳐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광풍을 막아주는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밤에 퍼지는 전염병도 우리를 해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불의,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다 청산하셨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고 허물에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질병에서 고침을 얻고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나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됩니다.

 

"소망" 혹은 "희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엘피스(ἐλπίς)입니다.

헬라어 엘피스의 일반적 의미는  "어떤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기대"를 말합니다.

엘피스(ἐλπίς)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질 때 이 소망(엘피스)을 통해서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5장(2-5절)은 이러한 엘피스(ἐλπίς)의 특징을 잘 담고 있습니다. 

2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ἐλπὶς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4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ἐλπὶς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이 희망ἐλπὶς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구절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소망(엘피스)는 하나님의 영광(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은 커녕 환난을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이 소망을 놓치 않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품은 이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했습니다.

Homo는 흙이라는 Humus에서 온 단어로서 인간을 뜻하고, Esperanse는 희망을 뜻합니다.

인간은 “희망하는 자(Man of hope; 희망의 사람)”라는 것입니다. 

 

희망은 용기의 근원이며, 약 중의 약이며, 가능성에 대한 소망이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적극적인 신념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여러 날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흙에서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형상이 된 절대희망의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습니다.

단테는 '지옥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다'고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살아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은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상실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동일한 악조건 하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해 버립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은 멀리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고 있습니까?

또 사람들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고있습니까?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은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의 앞길에는 곤고한 날도 있지만 형통한 날도 있습니다.
어두운 저녁이 지나면 밝은 아침이 찾아옵니다.
비가 오는 굳는 날도 있지만 햇빛비치는 청명한 맑은 날도 있습니다.
썰물만 있지 않지 않고, 밀물도 몰려옵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있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갑니다.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고 일도 합니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세를 살아갑니다.
인간은 약속된 시간이 지나가면 소망이 희미해지고 나중에는 소망을 잃게 됩니다.
아무런 방법이나 대책이 없을 때 기대를 잃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으로는 시효가 지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이르지도 늦지도 않고 정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믿고 하나님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방법이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시던지, 반석을 치시던지 하나님은 여전히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소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다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