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62)-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가족사랑 2021. 4. 7. 15:43

로마서 강해(62)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로마서 9장 14∼16절 -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입니다.

톨스토이는  <부활>,  <바보 이반> 등의 작품을 썼는데, 그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 등이 있는데,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의 작품들은 당시 퍼지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지식층(인텔리겐치야)의 폭력적인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기독교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변증하는 호교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행한 기독교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유명한 것은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등이 있습니다.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탈고할  즈음,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가 침대 누워 구술한 것을 아내 안나가 속기하여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몇 달 후 폐동맥 파열로 인하여 가족의 간호를 뒤로 하고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여인과 양파’라는 짧은 이야기가 하나 등장합니다.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은 선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악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여인이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을 안타깝게 여기던 천사가 혹시 이 여인의 삶에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을까 곰곰이 찾아보았습니다. 한참을 찾다가 언젠가 이 여인이 양파 하나를 자신에게 구걸하러온 거지에게 준 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사가 자랑스럽게 하나님께 이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똑같은 양파를 가지고 가서 그 양파를 이용해 그 여인을 지옥불에서 끌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인이 양파를 붙잡고, 천사가 그 양파로 여인을 지옥불에서 끌어내는 동안 양파가 부서지지 않으면, 이 여인은 천국으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사가 즉시 지옥으로 내려가서 그 여인에게 양파를 내밀며 붙잡으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양파에 매달린 여인을 지옥불에서 조금씩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여인을 끌어올리는 것을 보고 지옥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여인의 다리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다른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지옥불에서 나가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바로 나야. 이것은 내 양파라고.” 이 여인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양파가 그만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다시 지옥불에 떨어져서 영원히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여인과 양파'의 이야기는 심판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 여인이 보여 준 양파 하나의 작은 긍휼이 어떻게 심판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여인은 양파 하나 때문에 심판을 피해 거의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긍휼의 모습을 보였더라면, 이 여인은 완전하게 심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3)

우리가 베푼 긍휼, 그것이 아무리 작은 양파 하나일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경험하게 합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는 가끔 내 자신과 환경에 대해서 불만일 때가 있습니다.

왜 나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누구는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마음껏 누리며 사는데 왜 나는 항상 쪼들리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아들을 원했는데 왜 딸만 주시는가?

또 반대로 나는 딸을 원했는데 왜 아들만 주시는가?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생각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생각의 출발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셔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외모도 주셔야 하고, 좋은 머리도 주셔야 하고, 아들이나 딸도 내가 원하는 대로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맡겨 놓았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런 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셔야 할 의무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할 줄 모르고 반발하고 원망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의 출발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출발점이 잘못 되어 있으면 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습니다.

자신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들이 영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이렇게 방치해 두시는지 영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로구나!” “우리 백성이 믿고 구원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로구나!”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당연한 것이 아니로구나!”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겸손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교만해지고 감사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축복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들 낳는 것도, 딸 낳는 것도, 내가 구원 받은 것도, 내가 지금 건강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로 말미암은 것인 줄 믿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긍휼(矜恤)'이라는 말은 헬라어 엘레에오(ελεεω)라는 단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동정심, 자비, 불쌍히 여김, 구제, 친절, 은혜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동정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궁핍한 사람에게 그 궁핍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친절을 베풀고 은혜를 베푸는 이런 행위들이 다 긍휼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긍휼히 여기는 행위는 용서해 주며, 위로해 주며, 고통을 경감시켜 주며, 치유해 주며, 회복시켜 주는 행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긍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세기 3장21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편 103편12~13절)

 

하나님은 넘치는 긍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태 이후에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 1:49-50).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에베소서 2장4~5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낮추어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들 중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서 우리와 함께 깊이 느끼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성에 사는 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것은 고통스러워하는 그 과부의 슬픔을 예수님 자신이 가슴속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누가복음 7장11∼17절)

 

우리 인간이 멸망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한 너희를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긍휼의 사람'입니다(누가복음 10장).

그는 강도만나 거지반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처럼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재물, 시간, 물질 등을 동원해 그를 살렸습니다.

그의 나중일 까지도 책임지는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긍휼은 동정이고, 동정은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틀로 상대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만들어진 그 너머에 있는 '그'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노력을 해서 쟁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향해 하시는 모든 행위의 동기가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통로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죄짐을 지고서 고난당하는 인간과 같은 모습이 되신 것처럼 고난당하는 사람과 똑같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