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63)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9장17∼26절
긍휼의 하나님은 또한 토기장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20절)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며, 우리는 진흙과 같은 존재입니다.
누구에게 토기를 만들 권한이 있습니까?
당연히 토기장이에게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본인의 고유권한을 가지고 진흙을 이겨서 토기를 만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가리켜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진흙을 그냥 아무렇게 되는대로 토기를 만드시는 폭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적절하게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되어지도록 빚어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인간, 즉,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한덩이의 관계로 비유합니다.
바울은 그 진흙 한 덩이가 어떤 용도의 그릇으로 빚어질까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갖고있는 절대권(絶對權)을 강조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을, 또 다른 한 덩이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더라도 이는 온전히 그의 소관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만든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숴버리더라도 진흙 한 덩이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만드실 권한이 있습니다.
진흙덩이가 토기장이의 뜻을 거스릴 수 없듯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拒逆)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빚어지는 진흙덩이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의 용도(用途)에 따라 빚는 것이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이렇게 빚어 달라 저렇게 빚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원리를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눕니다.
‘진노의 그릇’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진노의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되었을 따름이지 멸망이 이미 선고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23절입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여기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라는 수식어는 ‘영광받기로 정하셨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긍휼의 그릇 그 자체가 영광 받을 만한 자격이 구비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렇게 정하셨다는 것뿐입니다.
진노의 그릇에게 내려야 할 진노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긍휼의 그릇에게는 은혜를 풍요롭게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폭군의 무분별한 횡포라든지 전횡과는 엄격한 구분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원칙은 죄인인 인간이 반박, 항거할 여지를 전혀 허용치 않습니다.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이사야 29장16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예레미아 18장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이 토기장이의 비유들은 죄악된 인간이 할 수 있는 질문의 맹점을 지적해 주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왈가왈부하는 인간은 자신의 피조물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자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로써 택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된 성도들은 스스로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자비를 찬양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악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상한 심정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긍휼의 그릇을 가리켜 ‘우리’라고 했습니다.
24절입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긍휼의 그릇이고, 이방인들은 진노의 그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긍휼의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이들도 포함됩니다.
유대인이라도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은 진노의 그릇이고, 이방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한 자들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절).
사랑하는 여러분!
장인들에게 고려청자는 어떠한 존재일까요? 말할수 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온 정성을 다하여, 반죽을 하고,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아로새겨 넣습니다.
장신만 아는, 신비한 유약을 정성스럽게 입힙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화로에 구워내야 합니다. 그런데 대충 불을 지펴 구워내는 것이 아닙니다.
온도가 놓으면, 그릇이 망가질라, 온도가 낮으면, 굽혀지지 않을라...
몇일 밤을 뜬눈으로, 화로에 장작을 넣습니다.
그렇게 토기장이는 질그릇을 구워 냅니다.
질그릇이 토기장이에게 그렇게 귀한 존재이듯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을 마치 토기장이처럼 온 정성을 기울이면서 완성시켜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말할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고난이 심하여 넘어질까, 사랑이 과하여 교만할까, 하면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편 12편 3∼4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심정으로 우리의 인생을 거룩하게 완성해 나가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달란트와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이는 좀 더 많이, 또 어떤 이는 좀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귀히 쓸 그릇으로 또 어떤 사람은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뚝배기는 뚝배기 나름대로 특별한 용도가 있듯이 천히 지음 받은 그릇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順從)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지고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그릇이 됩니다.
아니, 우리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일지라도 니느웨성의 사람처럼 주님께 회개하고 나아감으로서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내가 너를 들어 쓰리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큰 나무나 바위만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물인가? 불품없는 작은 들풀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작품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 모세처럼 스케일이 크게도 쓰셨고,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소개한 처녀 아이도 쓰신 것이며,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하나님이 쓰셨지만, 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야고보도 쓰신 것이다. 질그릇을 어떻게 쓰든지 그 권리는 토기장이에게 있다.”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반발하고 대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깨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안 든다고 당장 깨뜨려 버리셔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고귀한 피로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어주시고 닦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깨어진 마음, 상한 심정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으니”
이제는 내 안에 보배되신 예수님을 소유하므로 값지고 보배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택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矜恤)을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므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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