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
나는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 마가복음 9장 23∼24절 -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알아야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기도(主祈禱)이고, 둘째는, 사도신경(使徒信經)이고, 셋째는 십계명(十誡命)입니다.
<주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로 마태복음 6장(5~13절)과 누가복음11장(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3가지와 우리를 위해서 꼭 필요한 모든 삶의 영역들을 다루고 있는 3가지 기도로, 모두 6가지 기도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성경이 전하는 신앙의 근본진리를 가장 잘 나타낸 신앙의 고백으로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믿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믿습니다. 나는 성령님을 이렇게 믿습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론의 순서에 따라 신앙고백을 한 요약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갖추어야 할 열 가지 행동 지침입니다.
4가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나머지 6가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갖추어야 행동 지침입니다.
<주기도>,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 이 세 가지는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귀중한 신앙의 지침들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사도신경은 성경이 전하는 근본진리를 잘 정리해 준 신앙고백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척도가 됩니다.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가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하듯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그리고 잘하기 위해서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기독교(基督敎) 신앙의 지도이며 나침반입니다.
1. 믿는다는 것은 무잇인가?
믿는다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일정한 사람에 대하여 그렇게 확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대상이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신(神)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그 대상에 대하여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에 대해서 거북스럽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믿음이 너무 부족하거나, 실제로 불신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들처럼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신은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믿음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믿음은 실험(實驗)과 논증을 통해서 생길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둘 더하기 둘은 넷이 된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두 개의 나뭇가지와 또 다른 두 개의 나뭇가지를 나란히 놓고, 한, 둘, 셋, 넷하고 세어보면 넷이 된다는 것을 실제로 알 수 있습니다.
또 화학적인 것으로, 산소와 수소가 합해서 물이 된다는 것은 실험실에서 산소와 수소를 합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2) 믿음은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하므로 생길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의사나 전문가가 우리에게 어디가 나쁘다고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치료하면 좋고, 또 어떤 약을 복용하면 좋다는 의사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외과의사의 권위를 믿기 때문에 우리를 마취시키고 수술하도록 우리를 맡깁니다.
사실 우리는 그 진단이 정확한지 아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 가지 치료방법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문가를 믿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믿음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내어 맡깁니다.
(3) 믿음은 어떤 일의 결과를 보는데서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기를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전기의 존재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전기의 힘으로 전등이 켜지고, 텔레비전을 볼 수 있고, 냉장고를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우리는 기독교가 인간의 삶에 끼친 개인적인 놀라운 영향력과 또 인류 사회에 끼친 그 놀라운 변화를 보고 기독교를 믿을 수 있습니다.
김익두목사는 황해도 안악 출생으로 청년 시절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러나 1900년 미국인 선교사 W.L.스왈렌의 설교에 감동하여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년 후 세례를 받았는데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때 이미 성서를 100번 읽었습니다. 이윽고, 예수교장로회 제9대 총회장이 되고, 서울 남대문교회 명예목사로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전국 각지의 부흥회 청탁이 빗발쳤습니다. 그가 다닌 집회 수는 776회에 이르렀고, 설교 횟수는 2만 8000회, 교회 신축 150처, 병자 치유 1만 여 명,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명에 달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말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로 모진 고문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부흥사이자 병자를 치유하는 목사로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8.15광복 이후 북한에 남아서 교회활동도 제대로 못하던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자 교회로 돌아가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0년 10월 14일 50여 명의 신도와 함께 새벽기도를 하다가 일부 신도와 함께 공산군에게 총살되었습니다. 깡패 김익두가 목사 김익두로 순교한 놀라운 변화를 보고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4) 믿음은 경험(經驗)이나 체험을 통해서 생길 수 있습니다.
체험의 결과로 우리는 이제 ‘그렇다는 말을 들었어’라고 말하지 않게 되고,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났고 또 내가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 것을 직접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방법으로만 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읽은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2. 내가 믿나이다(I do believe)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아버지가 데려온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신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다른 병고침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곳에는 제자들의 무능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후 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이전에 벌써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아들을 고쳐주도록 부탁을 했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의 스승님처럼 멋지게 병자를 고치지 못하여 아버지에게 실망만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탄식의 말씀을 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19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병을 고치지 못하는 무능함을 ‘믿음이 없다!’는 말로 책망하십니다.
오늘 이야기는 병자를 데려온 아버지와의 만남이 중요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길러본 사람이라면 다 알 듯이 자식의 비참한 고통 앞에서 이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너무나 심하여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이 아버지는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완전히 낳게 해 줄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여러 병을 고쳤다더라’는 소문만을 듣고 아마도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는 이렇게 예수를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발작을 했고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만으로 들었을 뿐인데 사실 누가 그것을 완전히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22절)
이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은 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절규합니다.
“내가 믿어야 한다면, 좋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아니 믿고 싶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좀 도와주십시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결코 내 안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우리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우리의 힘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무기력했던 제자들처럼, 자신의 믿음 없음을 절규했던 아버지처럼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무력함과 믿음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6절)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주여! 믿습니다.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옵소서!”하는 소원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못 믿을 구실만 찾는 사람은 생전 교회에 다녀도 믿음이 안 생깁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야 됩니다.
의심이 생기면 그것마저도 하나님께 내어놓고 믿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소원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는 예수님께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절규가 아들을 귀신으로부터, 불치병으로부터 건지게 하였습니다.
3. 사도들의 믿음-사도신경(Apostles' Creed)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초대교회 제자들, 흔히 <속사도>라고 불리는 믿음의 선배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사도신경>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고 있었던 믿음의 내용들을 성경을 통해 주제별로 뽑아서 여러 교훈들을 통일성있고, 간단명료하게 진술하여 설명한 신앙의 근본진리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열두 사도들이 열흘 만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들이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주후 백년 경에 세례를 베풀 때 사용했던 세례문답서에 사도신경과 비슷한 고백문이 사용되었습니다.
3세기 초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내용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신조가 만들어졌는데, 당시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였답니다.
첫째,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둘째, 당신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셋째, 당신은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이 세 가지 질문에 “예,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교회는 세례를 베풀어 성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내용이 사도신경으로 정착되었고, 주후 8세기에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내용과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만들지도 않은 것을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 사도신경이 사도들이 고백한 신앙고백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18절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20절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나타내는 이 고백에 사도성을 부여하고 사도신경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의 생애와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체험한 사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믿고 있었는가를 잘 요약해 준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첫째 부분은 성부(聖父)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 부분은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승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에 대한 고백입니다.
셋째 부분은 성령(聖靈) 하나님에 대한 부분입니다.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제, 사죄, 부활, 영생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은 기독교교리를 잘 간추려 놓은 신앙고백서입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주후 170~180년 사이에 로마에서 로마교인들이 세례 예식을 베풀 때 세례를 받으려는 새 신자에게 고백토록 한 <로마교회의 신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사도신경>으로 불리어 사용된 것은 주후 390년 때였고, 가톨릭교회가 공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주후 8세기경 샬르만 대제가 널리 보급한데서 기인합니다.
사도신경은 세례후보자와 또 예배 때 신자들의 고백으로 중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이래로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등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신앙적인 배경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체험 후 교회가 예루살렘을 넘어서 이방인들이 각 도시에 전파되어 놀라운 속도로 지중해 연안지역에 왕성하고 있을 때,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근본 진리와는 다른 복음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주후 170년경부터 250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일시적 착각현상이니, 또는 예수님은 신적인 존재였지, 육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등의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등의 이단들이 나타나 정통 그리스도교회에 위협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그리스도교회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교훈을 받고, 모든 일의 목격자된 사도들의 말씀을 보존하고, 후세대의 신자에게 전승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처럼 이단들의 도전에 대처하고, 새 신자를 정통 신앙으로 안내하기 위해 성경의 주요 메시지, 신앙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작성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사도신경을 연구하고 배우는 것은 2000년 전 예수와 직접 만났던 사도들의 믿음을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고백하므로 우리는 초대교회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므로 이단 종교의 잘못된 모습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단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등등. 이단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예배때 사용하지 않는 교회나, 사도신경을 곱하지않는 교회, 또는 믿지 않는 교회들은 그들의 신앙을 의심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해서 고백하든, 아니면 일으며 고백하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더 우리의 신앙을 확실하게 하여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슴에 주님께 향하는 열정과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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