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 강해(6)-예수는 주님이시다

가족사랑 2022. 3. 28. 16:30

사도신경 강해(6)

 

 

예수는 주님이시다

□ 로마서 10장 9∼15절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교한 조직신학적 체계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다.

둘째,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셋째, 그의 이름은 예수이시다.

넷째, 그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칭하는 것은 거의 600번 가량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에만 250번 가량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것은 사도들의 최초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120명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건 후 베드로는 성령충만하였는데, 소문을 듣고 모여든 군중들을 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

그날 3000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로마서10장에서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나타나는 초대 신앙인들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20장28절)고 고백했습니다.

 

1. 예수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고백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 마음, 영혼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보존해 가시는 주인이십니다.

 

미국의 16대 링컨대통령은 신앙이 아주 훌륭한 분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전, 링컨은 어느 날 노예매매시장을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한 노예 소녀를 돈을 주고 샀습니다.

링컨이 노예를 산 것은 오직 그 어린 소녀에게 자유를 주고자하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는 링컨이 왜 자기를 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소녀는 단지 자기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되어 또 하나의 거래가 진행되는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

링컨은 소녀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는 그 소녀에게 자유증명서를 건네주었습니다.

소녀는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야, 이제부터 너는 자유야!” 링컨은 소녀에게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자유라고요?”

“그래, 너는 네가 싶은 어느 곳으로도 마음대로 갈 수 있다.”

그때 소녀는 링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다면 나는 당신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법적으로 그 소녀는 자유로웠지만, 그녀는 링컨의 사랑으로 기꺼이 링컨의 종이 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같은 경우입니다.

죄의 노예로부터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의 소유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종이 되었고, 소유물이 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한다는 절대적 소유에 대한 신앙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소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9〜20절)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와 미래에 오직 그 분만이 역사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향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우리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할 것을 강요당하고,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주에 대한 고백은 피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의 역사 안에서 되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안에서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하는 것을 모두 배격합니다.

 

마태복음 15장에는 예수님께 자신의 귀신들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온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릅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주인(主人)>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박대를 해도, 개로 취급을 해도, 모욕을 주어도, “종된 나는 주인의 처분대로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주인이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을 뒤돌아보면 예수님이 주인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개 취급을 받으면 절대로 그냥 가만 있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대듭니다.

'은혜를 안 주시면 안주시지. 우리보고 개라고요?‘

우리는 그만 그 대목에 가서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주인이냐 라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그분의 처분대로 끝까지 기다리는 가나안 여인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있을 때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2.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라는 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κύριος, kurios)라고 합니다.

이 말은 최고의 권위, 지배자, 귀하(貴下)“라는 뜻입니다.

 

‘퀴리오스’는 존경과 예의를 갖추어서 다른 사람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었습니다.

이 말은 영어의 "Sir", 불어의 "Monsieur", 독어의 "Herr"에 해당하는 말이었습니다.

‘퀴리오스’는 "소유주"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포도원 주인"(큐리오스)과 "나귀의 주인"(큐리오스)처럼 퀴리오스라는 말이 소유주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마 20:8, 21:40, 막 12:9, 눅 20:13,15, 19:33).

 

또 ‘퀴리오스’는 종과 반대되는 개념인 "주인"(Master)의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퀴리오스)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바울은 노예를 거느린 주인들에게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주인(퀴리오스)에게 종을 돌보고, 예수께서 자신의 주인(퀴리오스)임을 기억하고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 에베소서 6장5,9절, 골로새서 3장22절, 4장1절 -

 

또 ‘퀴리오스’는 "가정의 가장"을 나타내기도 했고, "후견인"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여인은 법적인 합의나 계약을 맺을 때에 후견인(큐리오스)을 동반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여인들은 결혼이나 이혼할 때에는 반드시 후견인과 동행해야 했습니다.

당시 퀴리오스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도와줄 수 있는 후견인, 또는 보호자를 의미했습니다.

 

또 ‘퀴리오스’는 "권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에 ‘퀴리오스’라는 말은 군사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을 부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또 당시에 사형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판사에게도 이 명칭이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에 퀴리오스는 범할 수 없는 법, 명백하고 확고한 결정, 그리고 권위 있는 판결이나 비준된 조약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이런 뜻으로 사용된 예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퀴리오스)이라!"고 하셨는데(막 2:28), 이 경우에 "주인"(퀴리오스)은 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분을 의미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퀴리오스’라는 말은 로마 황제(皇帝)를 부르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 사람들은 황제란 칭호를 사용하기를 주저했습니다.

그 이유는 황제라는 말은 주인과 종의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같이 보여서 썩 유쾌한 명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양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동양에서는 왕과 신하의 관계는 항상 주종(主從) 관계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퀴리오스"라는 말을 황제를 부르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황제는 신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으며, ‘퀴리오스’라는 말은 점점 더 널리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세기 말, 즉 도미티아누스 시대에는 ‘퀴리오스’라는 말이 황제의 고유한 칭호가 되었습니다.

이 칭호는 법령, 칙령, 선언 등을 선포할 때에 서두에 쓰였고, 심지어 동전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퀴리오스(κύριος)’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인역을 번역한 학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퀴리오스’, 즉 주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70인경에서 ‘퀴리오스’는 여호와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여호와를 ‘퀴리오스’로 번역한 경우는 150번이나 되었습니다(누기복음 2장9절, 4장8절 참고).

그러므로 "주"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70인경(헬라어 번역 성경)에서 약 6,000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바울은 예수님을 "주"(하나님)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주(主)"라는 말을 44번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33번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른 것이며, 8번이 하나님을 주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3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주라고 불렀습니다.

 

바울 당시 세상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주"(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세상에는 오직 한 명의 "주", 즉 황제만이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당시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만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을 하려면 생명을 포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황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잘 알려진 폴리갑도 예수를 주로 고백한 죄로 인해 화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한 관리가 폴리갑에게 한 번만 주님을 부인하고 황제를 주라고 부르면 살려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평생 동안 주님이 나를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는 데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겠습니까?"

결국 그는 주님을 주로 인정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 당시에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일은 생명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는 고백은 최초의 신앙 고백 형식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 사도행전 8장16절 -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 사도행전 19장5절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린도전서 12장3절 -   
이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으로 불렀던 그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이런 신적인 의미에서 "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일반화된 명칭이 이것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사도행전 1장21절)

※참조 (사도행전 4:33; 7:59; 8:16; 11:17; 15:11, 26; 20:21, 24, 35; 28:31)

마가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주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우사"라고 말합니다(마가복음 16장19절)

사도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합니다(마가복음 16장20절)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누기복음 24장3절).

 

3.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의 삶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는 것을 입으로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도 이 고백처럼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가 우리 자신의 삶과 온 세상에 미친다는 것을 시인하고 그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자주 우리 자신과 다른 그리스도인에게서 보는 것은 너무 부족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그의 삶과 사회적 삶, 모두를 예수가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고백이 단순히 입술로만 하는 고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경고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실천이 우리의 고백과 무관하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훈과 정신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면 십자가까지도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과 실천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에는 응당 실천이 요구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듯이, 우리도 그런 각오와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천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분명히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분명히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도들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