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4)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 누가복음 15장 11∼32절 □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가시고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성애가 강한 생물입니다.
가시고기 중 큰가시고기는 바다에서 살다가 해마다 이른 봄이면 산란을 위해 하천으로 올라옵니다.
암수 무리를 지어 올라온 큰가시고기는 약 일주일간의 민물적응기간이 지나면 본격적인 산란준비에 들어갑니다.
수컷 가시고기는 먼저 새끼를 키울 둥지부터 짓습니다.
하천 바닥에 둥지를 짓는데 육지의 새둥지와 모양이 흡사합니다.
먼저 바닥이 단단하고 평평한 자리를 골라 구덩이를 얕게 판 다음 수초를 물어옵니다.
그 다음 그 산란구덩이에 점액질을 배설해 수초를 단단히 엮습니다.
다음에는 주변을 주둥이로 박아 수초뭉치를 동그랗게 만들고 가운데에 구멍을 뚫습니다.
뚫린 구멍에 바람을 불어넣어 안에 공간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다시 수초를 물어와 점액질을 배설하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해 만 하루만에 둥지를 완성합니다.
수컷이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둥지를 만드는 동안 암컷 가시고기는 주변에서 둥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며 놀기만 합니다.
둥지가 완성되면 암컷은 얼마나 잘 지어졌는지 확인하고 마음에 들면 그곳에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 시간은 불과 3~4초, 산란을 마친 암컷은 미련 없이 둥지를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수컷 가시고기의 치열한 알 지키기가 시작됩니다.
알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수많은 침입자들을 물리치고 알들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둥지 안에 새 물을 넣어줍니다.
앞 지느러미를 이용해 부채질하며 새 물을 둥지 안에 넣고, 한편으로는 는 침입자를 물리칩니다.
아빠 가시고기는 잠시도 쉬지않고 아무런 먹이 활동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둥지 안의 알을 지키고 키워내는 데만 전념합니다.
마침내 만 8일째 되는 날 이른 아침, 새끼들이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알이 모두 부화해 새끼들이 탄생하지만 아빠 가시고기는 둥지를 떠나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태어나기 전보다 더 예민해지고 강해집니다.
둥지 안이 갑갑해 밖으로 나오는 새끼들, 아직은 나오면 안 된다고 둥지를 벗어난 새끼들을 물어다 안으로 집어넣으며 녀석들을 먹으려고 모여드는 침입자를 아빠 가시고기는 물리칩니다.
이렇게 다시 5일이 지나, 새끼들은 제법 자라 둥지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무리지어 둥지주변의 수초 사이에서 먹이 찾기에 바쁩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새끼들을 모두 안전하게 떠나보낸 수컷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생의 최후를 맞이합니다.
둥지 짓기부터 새끼들을 모두 떠나보내기까지 약 15일간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오직 새끼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수컷의 몸은 만신창이가 됩니다.
주둥이는 다 헐고 화려했던 몸 색깔은 볼품없이 퇴색해 그토록 애지중지 지키던 둥지 앞에서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며칠 후 둥지를 떠났던 새끼들은 죽은 아빠 가시고기 주위로 모여듭니다.
그 새끼들은 죽은 아빠의 살을 파먹고 자랍니다.
자기의 시신까지도 자식들의 먹이가 되는 아빠 가시고기의 놀라운 사랑은 흡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1.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식 사이는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핏줄기의 거리를 측량하는 말로 <촌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사촌, 오촌, 육촌 등으로 핏줄기의 관계를 촌수로 나타냈습니다.
이 촌수 가운데 가장 가까운 거리는 1촌인데,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는 1촌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일이 있을 때나 만나는 사이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만나고, 보고 싶은 관계입니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받아서 기쁘고 아버지는 자식에게 주어서 기쁩니다.
사도신경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전능한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을‘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옛날부터 다른 종교들에서도 불러 왔습니다.
고대 희랍에서는 제우스가 인간과 신들의 아버지로 불려졌고, 제우스는 아버지라고 하므로 모든 생식의 근원이며 우주에서는 가장 높은 신으로 여겼습니다.
철학자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플라톤은 창조의 하나님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타종교나 철학의 세계에서 불려진 <아버지>라는 칭호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구약 신명기 32장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6절)
이사야 68장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절)
신약 마태복음 5장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고린도전서 8장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절).
우리 말 성경에 ‘아버지’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히브리어 ‘아바’(ἈββᾶAbba, ab-bah)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아바’라는 말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아빠)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에 아이들이 ‘아빠’에게 이야기하듯이 친밀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대통령, 또는 황제라도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며 매달리는 자녀들을 물리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러한 자녀들이 있으면 환한 미소로 그들을 두 팔을 벌려서 안아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알고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신 것은, 주님이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가 나오는데,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요한복음 1장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2절).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양자로 삼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 기도는 친밀한 관계가 없이 형식을 따라 하는 메마른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2. 사랑이 충만하신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는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청을 마지못해 들어줍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곳을 갑니다.
거기서 그는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다 낭비하여 마침내는 한 푼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 돼지가 먹는 사료 찌꺼기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합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떠나온 집에 계실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집에 있었던 그 행복함을 생각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한편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이후 늘상 동구 밖을 보며 집나간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이제나 돌아올까? 저제나 돌아올까?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아버지는 언젠가는 내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발견합니다.
아들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외모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누더기를 입은 상거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금방 알아보고 돌아오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냄새나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키스했습니다.
종들을 불러서는 “어서 좋은 옷을 꺼내어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손에 끼우고 신발을 신기라”고 명령합니다.
또 다른 종을 불러서는 “아들이 돌아왔으니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 바로 탕자와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분께는 이미 과거가 기억되지 않으며, 지난날의 잘못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같은 지난날의 실수나 잘못이 더욱 더 아들을 깊이, 뜨겁게 사랑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전 일은 까마득히 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조건으로 사랑하시는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라 무제한적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가 그분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슬퍼하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고 무조건 많고 큰 것만을 요구하는 것을 슬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탕자의 비유에 묘사되어 있는 이 분을 우리가 아버지로 부를 때에 이미 우리는 그 분과 특별한 교제 가운데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러한 교제 안에는 하나님 외에 그 분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자매들과도 교제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교제 가운데 있는 형제자매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나만이 독점할 수 있는 아버지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이 어떤 분임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는 전체가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이라는 글자가 전부 51번 나옵니다.
그 중 4장에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31번 쓰여졌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간적인 아버지는 우리를 완전하게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색은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사랑입니다.
시편68편에는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이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 내사 형통하게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들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5〜6절).
마태복음5장에서는 악인이나 선인을 가리지 않고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45절).
3.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주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움직이시는 우주의 주인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당신은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나를 움직이시는 분입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거듭나게 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26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와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의 연약함을 돌보아줍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평안의 길로, 승리로 길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어떻게 자녀를 책임지십니까?
기도할 때 들으시고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7~1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린 소년시기를 지냈습니다.
이복 형들 때문에 그는 이웃 나라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팔려가서는 여주인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일생은 여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셉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났고 마지막에는 그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요셉 자신도 그가 그런 자리에 앉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양치는 목동으로 인생을 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명한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도 귀한 존재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보배롭고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생을 의미있게 사십시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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