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5)
그 외아들을 믿습니다
□ 요한복음 3장 16∼21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제 우리는 사도신경의 중심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우선순위로 볼 때 분명히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신비의 빛, 성령에 대한 신비의 빛이 드러나게 되고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기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별로 갈등을 느끼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앙의 갈등과 걸림돌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는 오늘 우리들 시대에서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도 적지않게 많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당대에 살고 있는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의 철학적 지성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나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에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교한 조직신학적 체계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다.
둘째,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셋째, 그의 이름은 예수이시다.
그리고 넷째, 그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외아들이시다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은 어머니와 딸의 관계처럼 가장 가까운 1촌 관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런 촌수로 가깝다는 것 말고 또 다른 의미의 가까운 관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를 닮았다느니, 엄마를 닮았다느니?”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라면서도 “누구를 닮아서 저런 행동을 하지?” 합니다.
이처럼 닮았다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외모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모의 성품, 성격, 행동, 버릇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데, 동네 아줌마들이 우리 아들을 보면서 ‘아빠가 누군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아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서 아빠가 누구인지 추측했습니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에 그 아버지를 연상하게 되고,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이해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상속의 관계>입니다.
지금은 법적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대부분 아버지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모든 재산을 아들에게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그대로 물려줍니다. 상속은 아버지로서 응당 주어야 할 의무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아들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가 죽지 않았는데도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응당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갔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속의 관계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절) 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상속의 관계입니다.
2. 유일한 아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외아들이라는 고백은 이러한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에는 “외아들”, 또는 “독생자(獨生子)”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 의미는 단순히 부부관계에서 태어나는 아들, 혈통을 이어받은 독자라는 의미에서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어로 'His only Son'입니다. 즉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독생자’를 ‘모노게네스(monogenes)’리고 합니다.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의 의미는 ‘유일하게 태어난’것을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자이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외아들(獨子)’이 아니고, 하나님의 ‘유일(唯一)하신 아들’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하게 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만들어졌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온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니케아 신경(-信經, 라틴어: Symbolum Nicaenum)은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비롯한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기독교회가 채택한 신앙 고백문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빛이시며, ... 하나님에게서 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정리한 세례의 믿음 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발전하여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4세기가 되어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렸고, 5세기 들어서 현재 형태를 갖추었으며, 10세기 완결된 형태로 오토 대제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과 함께 서방교회에서 공식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양의 목자다. 나는 선한 목자다”고 하시다가 마지막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때 유대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와 아버지와의 유일한 관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아버지의 의지, 행동, 본질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닮았다는 것 이상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 받는다는 것 이상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38절)고 했습니다.
이 ‘유일한 아들’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에서 그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종의 삶을 통해서 그 자신이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분이 아니고 전 인류를 위한 분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이 유일한 아들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 홀로 있지 않고, 섬김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 고백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립보서 2장 6∼8절 -
예수님은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화해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과 형제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마지막 때에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 히브리서 1장1∼3절 -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오셨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분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불러내시는 분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영생의 세계를 상속하셨습니다.
3. 아버지를 대신한 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외아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심판을 인간들에게 전달해 주는 아들이십니다.
요한복음 5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6〜27절)
요한복음 5장21〜22절에서도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마태복음 5장31〜33절 -
이처럼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명을 전달하시기도 하시지만,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외아들에게 생명과 심판의 권세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낮추셨습니다.
사람의 자리에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종이면서도 죽음으로 복종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놓았습니다.
높아지려는 사람 속에서 낮아지시고 더 작아지셔서 흠모할만한 모양도 다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외아들의 모습입니다.
제자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마태복음 16장16절 -
베드로의 이 고백에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형을 받고 운명하는 전 과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주위사람들은 마태복음 27장에서 이런 증언을 남겼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54절)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신경의 "그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이었다가 무슨 큰 공로가 있어서 나중에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된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인간으로 낮아지셔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고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해 주시려고 아들을 속죄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으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불우하게 사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물로 배를 채운 적이, 빵을 먹은 적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그녀는 이웃에게 발견되어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왔으며, 그녀는 죽음의 한계상황까지 왔습니다.
그 때 한 구호단체가 그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모녀는 그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그 단체는 국제연합아동구호기금(UNICEF)으로 지구촌의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구호빵을 먹으며 위기를 극복했고, 그 구호 단체를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생명을 부지한 그 소녀는 장성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되었습니다.
그 소녀가 바로 오드리 햅번입니다.
그녀는 “절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준 분들을 위해 이제 내가 봉사할 차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유니세프의 홍보대사를 열심히 하다가 하늘나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겸손해야만 실천 할 수 있습니다.
온유해야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복종해야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낮아지고 섬겨야만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보다 우리 죄인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외아들 독생자까지도 희생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일서 5장 9∼10절 -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절).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에게 천지만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은 선물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선물은 그 외아들,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를 통해 하나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평안!
'사도신경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신경 강해(7)-예수/마리아의 아들 목수 (1) | 2022.04.04 |
---|---|
사도신경 강해(6)-예수는 주님이시다 (0) | 2022.03.28 |
사도신경 강해(4)-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0) | 2022.03.28 |
사도신경 강해(3)-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0) | 2021.04.29 |
사도신경 강해(2)-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0) | 2021.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