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 강해(7)-예수/마리아의 아들 목수

가족사랑 2022. 4. 4. 20:59

사도신경 강해(7)

 

예수 - 마리아의 아들 목수

 - 마가복음 6장 1∼6절 -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성경과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식의 성(性)을 쓰지 않는 성서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자식이 아버지나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일이 잦았습니다.

근래에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어느 여인의 상속 관련 재판 기록에 보면 남편의 이름도 예수, 시아버지의 이름도 예수, 아들의 이름도 예수였습니다.

 

고대 유대교의 변증서인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따르면 「70인역」을 번역한 72명의 유대인 학자 중 세 명이 예수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 중에는 약 20명의 예수가 등장하는데 그 중 저자와 동시대 사람인 예수만 해도 10명이나 됩니다. 주후 2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유대세계에서는 대중적이었습니다.

적어도 다섯 사람의 유대 대제사장의 이름이 예수였습니다.

유다, 요한 야고보라는 이름과 같이 <예수>라는 이름은 보통 남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철수니, 영희니 등과 같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여러 신약 사본에 따르면 우리 주님 예수 대신 풀려난 바라바의 이름도 원래 ‘예수 바라바’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빌라도는 두 예수를 대중 앞에 내어놓고 그 중 어느 예수를 풀어줄까 물었던 셈입니다.

 

바울이 살라미 섬에서 만난 거짓 선지자의 이름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사도행전 13장6절)

물론 그 박수 무당이 우리 주님의 아들이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범한 한 인간 예수가 되셨다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예수(יֵשׁוּעַ)”는 ‘여호수아(יְהֹושֻׁעַ)’라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출애굽을 완성한 모세의 후계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 귀향지에서 돌아온 여호수아 등, 구약시대에 <여호수아>는 잘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입니다.

마태 1장21절에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라는 그 흔한 이름을 그들의 신앙고백 조항에 넣었을까요?

1. 예수 - 역사상 실제 인물

예수님은 역사상 실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주’,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교회들의 숫자가 불어나고, 규모가 커지면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자기네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 실제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해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다니시던 때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사람인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 피곤하셔서 우물가에 걸터앉으셨던 일, 화가 나실 때에는 분노하시며,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가 있을지어다’고 화를 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에서 비둘기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던 일,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던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3년동안 공생애 활동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일,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 또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일 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후 삼십년이 지나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3년을 생각해보니 마치 꿈과 같이만 느껴졌습니다.

신앙이 약한 자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형편에 처해있을 때, 예수님은 실제로 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환상적으로, 즉 유령으로 계셨다는 말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으며 더구나 자기 제자에게 팔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너무 신성하고 신비스럽게 본 나머지 예수님의 신성,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인성, 즉 예수님의 인간되심을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 1,2,3서의 기자는 요한복음의 기록한 사람과 같습니다.

이 서신은 요한이 노인이 된 후 주후 90~91년경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목적은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훈을 경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상으로서 나중에는 가현(假現)설이란 이단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십자가에 죽은 분은 인간인 예수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 고난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2~3절)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1절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면서 분명히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사람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에 왔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보셨습니다.

마리아가 울고,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한복음 11장33절).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가 목마르다”는 말이 나옵니다.

육체를 가진 예수님은 몸에서 피와 물이 다 빠져나갈 때 의학상으로 목마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면 “내가 목마르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마가복음 6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가지신 분이신 것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 동네의 젊은이임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놀고먹었던 한량이 아니라 목수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실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래로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의 이름을 가진 남동생들이 있었고, 또 누이동생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던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5~8절)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증언은 예수님이 분명 사람의 몸을 입으신 존재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고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2.  인간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육체을 입으신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그 신의 본질을 포기한 것이 아니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성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마리아의 장남 예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그는 스스로 진실한 하나님이면서 또한 하나의 진실한 인간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동시에 거하는 신인(神人, God-Man)임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힘든 노동자였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의 생애동안 목수일로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장인 수준의 목공도 아니었습니다.

흙을 이용하여 집을 짓는 당시의 육체적인 노동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노동자 생활을 통해서 당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가난에 굶주리는 민중을 목격했고 남편 잃은 과부의 부르짖음을 목격했습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루 품삯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시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임금 차별도 없는 나라라고, 그 나라는 부자들이 들어가기가 어려운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우리 가운데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을 향하여는 우리의 속죄주가 되십니다.

 

세계 문학사 대계의 저자인 'H.G. 웰즈'는 유사이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예수를 지적하고 예수님이 위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예수가 위대하다는 말은, 그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쌓아 놓았는가, 혹은 죽음과 함께 무너져 없어질 그 무엇을 얼마나 많이 건설하였는가에 의하여 평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가 세상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세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며, 인간들에게 어떠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는가에 따라서 정한 것이다.”

크리스천도 아니요 개인의 영생을 믿지도 않는 순수한 과학적 역사가인 그가 예수님을 역사상 최대의 인물로 꼽은 것은 유사이래 예수님같이 위대한 영향을 인류에게 준 사람이 없고 또 그분같이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갈릴리' 목수의 집에 탄생하신 예수는 사가 '웰즈'가 본대로 인간적인 입장에서만도 역사상 최대의 위인의 영예를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결코 그렇게 단순한 역사적 인물만은 아닙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는 너무나 위대한 것, 너무도 이상한 것, 너무도 거룩하고 신비스럽고 역설적인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념상이나 전기만을 남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 안에는 인간의 힘 이상의 힘, 자연의 힘 이상의 힘, 즉 어떤 신비한 초자연적인 힘이 활동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3.  예수 -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해줍니다.

나사렛사람 예수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곳에서도 이 같은 참사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인간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은 정말 우리가 마음 놓고 턱 기대도 전혀 불안하거나 또 밑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 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진정으로 우리를 이 세상에 내신 하나님은 내리 사랑의 고귀한 마음으로 하찮은 존재인 나를 위해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 생존 시에 예수님을 찾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대에 뒤지거나 그 시대의 뒷골목을 서성거리던 변두리 인생들이었습니다.

온갖 불치병을 가진 환자들, 가난한 민중들, 손가락질 받던 창녀들, 매국노라고 천대받던 세리들, 죄인들, 불구자들에게 예수님은 참된 친구요, 위로자요, 치료자요, 안식처였습니다.

 

예수시대 이후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시대 시대마다 이 같은 반 토막 인생들에게 나사렛사람 예수는 힘을 주었고, 용기를 주었고, 꿈을 주었고, 새 생명을 주었습니다.

인간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결코 먼 거리에 있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어느 항성 뒤편에 숨어 계시거나, 우리가 목청껏 떠들어야 겨우 대답하시는 분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그 분은 나에게 가까이 계시고,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벌이실 분이십니다.

그 분은 이미 내 안에 계시고, 나의 모두이시며, 나 자신입니다.

시대마다 그분을 위해서 피를 흘리며 죽음을 택했던 선배 신앙인들이 조금도 자신의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 예수는 우리의 친구이시며, 동생을 아껴주시는 우리의 맏형님과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자신이 지치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때때로 모욕과 천대와 배척을 받으시고, 더욱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변명하거나 그러한 인간을 미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처럼 살아라, 나를 본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분의 작은 동생으로 이곳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 예수의 삶을 닮아가려는 작은 예수로 이곳에 있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마리아의 아들 목수 예수,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 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더 가까이, 보다 더 가까이 그 분처럼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