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 강해(8)-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가족사랑 2022. 4. 6. 22:57

사도신경 강해(8)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마가복음 8장 27∼34절 -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성경과 예수님 당시에 잘 알려진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식의 성(性)을 쓰지 않는 성서시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자식이 아버지나 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일이 잦았습니다.

근래에 사해 근처에서 발견된 어느 여인의 상속 관련 재판 기록에 보면 남편의 이름도 예수, 시아버지의 이름도 예수, 아들의 이름도 예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후 2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유대세계에서는 대중적이었습니다.

유다, 요한 야고보라는 이름과 같이 <예수>라는 이름은 보통 남자에게 붙이는 이름으로, 우리 식으로 하면 철수, 영희 등과 같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름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직책을 수행하는 이름입니다.

저를 교회에서 장득룡 목사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장득룡은 이름이고, 목사는 직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명입니다.

 

그리스도, 크리스트, 또는 기독(基督)은 고대 그리스어: 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기름 부음을 받은 에서 온 말로 70인역에서 히브리어의 메시아(히브리어: מׇשִׁיחַ 마쉬아흐→기름 부음을 받은, 히브리어: מׇשִׁחַ 마쉬아흐, 고대 그리스어: Μεσσίας 맛시아스[*])를 옮기는 데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 크리스토스)는 헬라어이고, 메시야(מׇשִׁחַ 마쉬아흐)는 히브리말입니다.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מׇשִׁח), 즉 그리스도(Χριστός)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누구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기름부음’은 원래 옛날 히브리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임직할 때 그들을 성별하는 의식으로 행해졌습니다.

사무엘상10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울을 만나 기름을 붓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사무엘상 10장1절)

사무엘은 또 이새의 아들 목동 다윗에게도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사울은 왕의 자격을 잃고, 대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장에도 보면, 제사장 사독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에서 기름 담은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뿔나팔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열왕기상 1장39절)

이처럼 이스라엘에서 왕이 되는 하나님의 예식은 기름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될 사람에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 예식을 집례 했습니다.

아무리 아론 자손이라 할지라도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에게도 기름을 부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후계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열왕기상 19장16절).

 

이처럼 구약성경은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등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수행할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메시아’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야는 장차 임할 분으로 대망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대망하는 ‘메시야’라고 증언합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어부 시몬의 동생 안드레가 형 시몬을 찾아가서 “형, 나 메시아를 만났어!”라고 말합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요한복음 1장41절)

요한복음4장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메시야 이야기를 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한복음 4장25절)

 

마가복음1장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마가복음 1장1절)

에베소2장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에베소서 2장13절)

빌립보서2장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장5절)

누가복음2장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복음 2장11절)

로마서6장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장23절)

 

이처럼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르는 것은 신약성경에 642번 나옵니다.

 

1. 예수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3중의 의미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입니다.

첫째는 선지자로, 둘째는 제사장으로, 셋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시는 동안에 선지자의 직무를 담당하셨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직무는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알려주고, 율법을 해석해주고, 또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을 예고함으로써 죄를 회개케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오는데, 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한복음 6장14절)

누가복음 13장에는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장33절)고 하시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신자자의 사명이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누가복음24장에는 슬픈 빛을 띠고 가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십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누가복음 24장19절)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사람이라면, 제사장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의 구체적인 직무는 첫째, 제사사역으로서 속죄를 위해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둘째, 중보사역으로서 백성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일 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 직무를 직접 행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직접 대속물(代贖物)로 내어놓으심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하셨습니다.

 

마가복음10장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디모데전서 2장6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히브리서9장12절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4장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예수님은 이 직무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시키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고린도후서5장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디모데전서2장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오늘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그의 속죄에 기초하여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변호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이같은 예수님의 제사사역에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와 헌신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두 가지 영역에서 수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왕권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적 왕권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왕권은 그의 백성과 교회에 대한 통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영적 왕권은 물리적 왕권이 아닙니다.

물론 당시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 나왔던 나다나엘이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한복음 1장49절)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들어가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한복음 6장15절).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헤롯은 장차 왕이 될 아기를 죽이기 위해 2살 미만의 아기들을 모조리 살해하는 짓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되어 빌라도 법정에 섰습니다(마태복음 27장11절).

이때 빌라도가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때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이 옳도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그의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소유함으로서 우리 영혼의 적들인 악마, 죄, 세상, 죽음 그리고 지옥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

그러면 기원 1세기의 사도들은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희망을 상징하는 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한 민족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고난을 반추하면서 하나의 희망을 가져 왔습니다.

그것이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오는 날에는 모든 고난이 사라지고 참 평화의 세계가 전개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당시의 종교인들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잘못보고 십자가에 처형했지만 예수님을 따랐던 갈릴리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룰 약속의 성취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과 하룻밤을 같이 있은 후에 기쁨에 넘쳐서 자기 형 시몬에게 달려가 “형,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이후에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희망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칭호가 더 분명하게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첫 설교를 통해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사도행전 2장36절)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사렛 예수님을 호칭할 때 꼭 그리스도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특히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의 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장1〜2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 더 깊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희망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불안의 존재요, 절망의 존재입니다.

미래에 희망이 없는 존재요, 죽음을 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은 극복됩니다.

심지어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해방이요, 희망이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들의 현실적인 두려움이나 좌절, 고통이나 낙심이 더 이상 활개를 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로마서 8장34〜35절)

바울은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심지어 사망까지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장38〜39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괴롭더라도,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절망적이라 하더라도 그는 항상 도전적이며, 희망의 사람입니다.

비전이 있고, 새생명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희망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무리이며, 희망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한 그는 사단에게 무릎 꿇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환경에도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희망을 가지고 승리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