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0)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없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 누가복음 23장 1∼25절 -
사도신경에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에서 그들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있어서 전혀 반대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과 야합하므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예수의 잉태를 받아들이므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거부하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지극히 존귀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비참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1. 빌라도는 누구인가?
빌라도(Pontius Pilate)는 유대지방을 다스리는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이었습니다.
로마 본국에는 황제(가이사)가 있고, 그 밑에 13명의 총독들이 식민지를 각자 맡아 황제를 대리하여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이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주후(AD)26〜36년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이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로마기를 거룩한 도시로 가져와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세를 전유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 병정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까지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누가복음 13장1절)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시리아 지역에 속한 유대 지역 행정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맡았습니다.
본래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전후하여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으로 임시 사령부를 옮겨 놓은 때에 예수님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수께서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빌라도에게 끌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1.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2.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3. 자칭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는 처음에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그때 역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사건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하던 차에 예수를 직접 뵙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뵙기를 원했던 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헤롯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지 않자 그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보니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보면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애쓴 흔적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가 볼 때 예수님은 다른 일반 범죄자들과 달랐습니다.
빌라도는 오랫동안 로마의 재판을 주관해왔지만 아직 한 번도 이런 사람을 만나본 일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14절이나, 마가복음 15장5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 것을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마태복음 27장13~14절)
빌라도는 그동안 극심하게 자기를 변명하는 반항자들을 보는데 익숙해 있었습니다.
자비를 애원하며 탄원하는 비굴하고도 무서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만을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냉정하고, 평온하고, 정정당당한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재판관이 아니고 오히려 피고인 것과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재판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들끼리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치적 음모와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는 계획을 지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원하든 말든 할 수없이 이 일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잘못이 없다는 것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누가복음 23장13~15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고 주장했을런지는 모르나 그가 로마제국의 권세에 대해 정치적으로 위협을 주는 그러한 종류의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에수님을 자기 앞에 끌고 온 유대인들의 악의에 넘친 동기, 즉 대제사장들의 시기심 때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마태복음 27장18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구해줄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들이 선택한 한 죄수를 그들에게 석방해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혁명가요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마가복음 15장9-14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가시로 면류관을 씌어 모욕과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당했습니다.
빌라도는 이 모습을 보고 거듭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며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무리들은 <십자가의 사형>을 원했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으로 매수된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압력을 가하자 빌라도는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빌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록자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살려주려고 애썼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을 남겼을까요?
나쁘기로 하면 대제사장 무리들이 더 나쁜데 그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풀어보려고 애쓴 한 정치가에게 돌팔매질 하듯 예수님의 죽음을 그에게 씌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틀림없이 역사적 존재였다는 것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은 것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기원후 26년~36년 사이에 로마제국의 유대총독 빌라도의 통치하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존재임을 사도신경은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고난을 받으사>라는 이 간결한 표현으로서 예수님의 인격과 역사를 환상과 신화와 상징으로서 처리해 버리려는 일체의 시도를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마태, 마가, 누가 등 복음서 등을 보면 로마제국의 황제들, 유대의 왕들 등 역사책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역사적인 인물인 것을 알게 되고, 또 예수님의 생애를 목격자들이 솔직하게 증언한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신비 속의 종교가 아닙니다.
역사적이고, 삶이고, 인간적입니다.
신비적인 요소가 없지 않으나 오히려 그런 신비적인 것을 역사 안에서 매듭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서 구원사건을 일으키셨다는 것이 역사인 것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고백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이외의 다른 역사적 문헌에서는 빌라도총독이 그렇게 두드러진 역사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유력 정치인도 아닙니다.
단지 그는 로마제국의 한 변두리 지방총독이었고 잘 일려지지 않은 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책임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요. 그 나라의 민중을 죽고 살리는 책임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재판에서 빌라도의 망설임으로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정의를 내팽개치고 기회주의자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적들에게 넘겨주므로 항복하고 맙니다.
이것은 포기한 자의 행동이고, 타락한 기회주의자가 걸어가는 길입니다.
물론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주저했습니다.
어떻게든지 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권을 가진 그가 자신의 정의를 포기하고 불의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2. 고난을 받으신 예수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고백은 예수님께서 현실의 역사에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고난의 삶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고난, 실패, 죽음의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에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삶의 현실로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믿으면 고난, 질병, 죽음에서 면제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해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셨다”는 것은 신자의 길이 어떠한 길이 될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가는 곳은 물론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신자들에게는 거쳐야 할 고난의 과정이 많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13〜14절)
믿음의 선배들이 간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때로 맹수에게 찢겼습니다.
불에 타서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칼에 목베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희생과 수고가 있었기에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주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관심하고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거나, 고난 가운데서 자기 학대를 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은 지난 날 역사의 한 시점 빌라도의 치정 때에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해방의 삶으로 부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새로운 생의 패러다임(paradigm)을 갖게 되고, 삶의 새로운 원리들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게 됩니다.
※ 패러다임(영어: paradigm)은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토머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년-1996년)이 제안하였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낡은 것들을 하나하나 벗어놓고 새로운 문화의 옷을 갈아입습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을 우리의 생의 목적지로 삼게 됩니다.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지평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녀도 있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라합과 같은 기생도 있고 다말과 같은 여인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이 현실의 역사의 그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그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의도적이건 우연이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때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입을 열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길만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분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편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는 무슨 이유나 이치를 따져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무슨 이치에 맞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때때로 자식들에게 말도 되지 않은 억울한 소리를 할 때가 있어도, 비록 그것이 경우에 맞지 않은 일이지만 그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는 말씀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묵묵히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며,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이 비록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불평이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고 가십시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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