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2)
무덤에 묻히신 예수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 누가복음 23장 50∼56절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곧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무덤에 묻히신 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마지막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먼저 빌라도에서부터 시작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는 3중의 고난입니다.
사도신경이 거듭 밝히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27장50절에는 예수님께서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고 운명하시는 장면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39절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형장 집행자인 백부장이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고 하는데, 백부장의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단순한 증언처럼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얼마나 확실하고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던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23장46절에는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역시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30절에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돌아가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4복음서 모두가 이처럼 생생하게 죽음에 대한 목격담을 기록한 것은 그 죽음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도신경이나 복음서에서 분명히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이 분명히 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시신은 매장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죽으면 빨리 그들의 눈앞에서 보이지 않도록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도 중동지방에 있는 유대인들은 누가 죽으면 24시간 안에 매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매장하는 이유는 그 지방의 기후가 열대성에 가까워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은 그 시체를 깨끗하게 씻어서 흰 천으로 싸거나 사지를 꽁꽁 묶어서 매장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시체에 값진 향유를 바르는 거의 보통이었습니다.
그리고 묘는 대체로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어 그 안에 안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도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십자가 위에서 내려져 세마포로 싸서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가정용으로 파둔 새무덤에 안장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9~60절에 보면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깨끗한 세마포를 가져다가 십자가에서 급히 내려진 예수님의 시신을 미처 깨끗이 손을 보지도 못한 세마포로 쌓아 자신의 무덤에 안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마태는 무덤에 안정되었다는 증언을 한 후에 이어 그 무덤을 군인들이 지키고 총독이 도장을 찍어 봉해 놓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는 이야기까지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마태복음 27장65∼66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하나님의 외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신 후 매장되었다고 고백한 것에는 어떤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까요?
대체로 위대한 인물은 죽지 않는다고 믿어왔습니다.
예수님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최후까지 가졌던 그러한 기대는 결국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행여나 십자가 위에서 기적적으로 내려오거나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자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사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으나 결국 그것이 눈앞에 사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매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매장은 일반인이 걸어가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가 아님을 확인하므로서 그들은 대담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매장되었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무덤에 묻힌 매장에 관한 성경 기록을 볼 때 예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운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매장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셨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는 성경의 기록과 사도들의 이 고백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장례식으로 끝이 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한 사람의 생생한 죽음을 말하는 동시에 예수님께서 인간이셨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똑같이 죽어 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설명하기는 쉬었습니다.
그러나 신성(神性)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인성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병 고치시던 일, 물 위를 걸어가신 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 등 모든 기적사건들이 마치 무언가에 홀려서 착각을 일으킨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이셨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한 사람들이 도케티즘(Docetism)이라는 이단입니다.
※ 가현설(假現說) 또는 도케티즘(Docetism, 그리스어로 "보이다"는 뜻인 δοκέω[dokeō]에서)은 예수는 하나님이기에, 인간으로서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이다. 간단히 말해서 가현설은 예수는 사람의 탈을 쓰고 왔으므로, 사람이 아니라면서 예수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교리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고난 받은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영지주의자들은 주장하였다.
그들은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를 두고 영과 육을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고, 인간은 육체이기에 하나님이 육을 입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동정년 탄생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비둘기 모양을 하고 내려오셔서 예수에게 덮어씌워 예수가 그리스도로 화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년간 계시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영이 사람의 눈에 보일만큼 둥근 고리 형태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 것이지 완전히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가 당한 것이 아니고 예수라는 한 인간이 당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가 죽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는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6∼8절)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이는 분명 사람의 몸을 입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요, 더 나아가 장사지내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은 그 시체로 인하여 더욱 그리스도가 사람이심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사실을 취급하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3. 고난의 비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지내셨다는 이 모든 일련의 사실들은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서 볼 때, 불행한 사건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어느 누구에게 이같이 일이 일어났다면, 그는 굉장히 불운한 사람입니다.
꽃봉오리도 피워보지 못한 처녀랄 수 있고, 젊음의 기상을 채 펴보지 못한 청년이랄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보는 눈들이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참 안됐다”
“거 똑똑한 척 하더니…”
이런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말 못하는 사람들은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일에 대해 애통하며 하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 누가복음 24장 13~21절 -
이 두 제자들 뿐 아니라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희망을 걸었었는데 이제 그 희망이 산산이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추진하는 방법과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한 곳에서부터 시작하십니다.
우리들이 불운하고, 불행하고, 실패하고, 망한 그 곳에서부터,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두 손 든 그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불행한 곳에서 시작하시고, 포기한 곳에서 출발하시고, 죽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난파된 배에서 홀로 살아남아 무인도까지 흘러가게 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럭저럭 오두막 한 채를 지어 그 안에다가 가라앉는 배로부터 간신히 구해낸
'얼마 안되는 모든 것들'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배가 그를 발견하고 구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지나가는 배가 있지 않을까 하고 매일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와 보니
그의 오두막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가 겨우 건져올렸던 물건들이 연기가 되어 날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기도한 보람도 없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적어도 그에겐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려 불이 나게 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날 배 한 척이 무인도에 도착했습니다.
그 배의 선장이 하는 말이,
"우리는 당신이 보낸 신호를 보았소."
그의 오두막집에 불이 나 연기가 타올랐을 때 그 연기를 보고 그를 구하러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장8∼9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생각이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과 다릅니다.
로마서 11장 33절의 말씀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고대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육체적인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입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승승장구 잘 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취직하고 좋은 남편, 아내 만나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하면 축복받았다고 하고, 병들면 저주받았다고 합니다.
사업 잘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하고, 안되면 무슨 저주 받을 일했나?며 두려워하는 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그리고 우리들 쪽에서 가장 최후의 절망으로 여기는 무덤에 묻혔다는 사도들의 고백을 통해서,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부활을 성취하는 하나님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 다른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아픈 것이 아닙니다.
실패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다시 시작하라는 출발신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세계 안에서 고난의 삶은 불행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악의 극복을 위해서, 악을 파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는 일이 없었다면 결코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기에 그리고 무덤에 묻히셨기에 부활이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새로운 신앙의 다짐을 하게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가이 실현되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과 죽음의 중심에 서 계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은 그냥 팔짱을 끼고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아픔 속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민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통곡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절망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십니다.
당신의 택한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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