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3)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고린도전서 15장 1∼20절 -
세상을 살다가 보면 답답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마음대로 되는 일도 잘 없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만 닥쳐오고 걱정이 되는 일들만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열심히 기도하면 모든 일들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모든 사람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살려고 하면 일들이 더 잘 안 풀리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대강 적당히 사는 사람이 잘 되기도 하니까 믿음에 회의가 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끝까지 믿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사도신경 중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고백은 신앙고백 중에도 가장 핵심적인 고백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도 이 부활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속에는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복된 소식 복음이라고 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다
어떤 대학교수가 인도의 성자 썬다싱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믿어온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썬다싱은 간단히 대답하기를 “부활하신 예수가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죽음에서 생의 의미를 찾지만 오직 기독교만은 부활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다시 살수가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가장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실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로 사탄과 사탄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은 끝임이 없이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 예수님의 부활은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기적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일시 기절했을 뿐인데, 이것을 죽은 줄 알고 장사 지냈는데 정신이 되돌아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기절을 해서 의식을 잃었다가 서늘한 무덤 속에 눕혀졌을 때 다시 정신을 차리게되고 어떻게해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당한 의문점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갈보리까지 메고 갈 수 없으리만큼 매를 맞고 시달렸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죽은 것을 확인하는 창을 옆구리에 찔렀을 때 피와 물까지 나왔다고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하고도 되살아 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피와 물을 다 쏟은 예수님이 어떻게 무거운 돌을 굴려낼 수 있으며 로마군의 감시는 어떻게 따돌릴 수 있었겠습니까?
두 번째는 도난설입니다.
시체를 훔쳐갔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고 그것을 감추고 나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구조물 전체가 계획적인 사기행각에 기본에 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냈다고 합시다.
제자들이 과연 이같은 거짓말을 퍼뜨리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이후 40년동안 대부분의 사도들은 순교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죽는 경우가 혹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획적인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죽을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거짓을 지키기위해 한 두 명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환상설입니다.
부활의 이야기가 전부 환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환상을 보았거나 귀신을 본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럴 듯도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도 그리운 나머지 착각 속에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아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부활 후 예수님께서 한 개인에게보다는 여러 사람이 모인 무리에게 더 많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보아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가 없을 때 열 사람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
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한복음 20장19∼23절)
그리고 또 도마가 있을 때 열 한 사람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한복음 20장 26∼29절)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일시적으로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던 일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환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가 500여명씩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환상이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는 많은 도전을 받고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합당한 설명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제자들의 증언과 그것을 기록한 신약성경과 <사도신경>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기록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어떤 필자가 조작해서 쓰여진 것이라는 흔적이 없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 같이 모든 목격담을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 나타난 부활의 목격담에는 복음서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빈무덤에 관한 유대인들의 설명에 대해 그것을 부정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도 무덤이 비었던 사실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넌지시 비치었습니다.
이에 대한 마태의 기록은 “무덤이 봉인되어 있었고 또 경비되어 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마태복음 27장63~66절 -
마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다가 천사로 부터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로부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에 가실테니 거기서 예수님을 뵈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 마가복음 16장 1~11절 -
누가복음에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 목격담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의 실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누기복음 24장30절 -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도 몸의 실체를 가지고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요한복음 21장12~14절 -
이 모든 기록들을 보면 그들의 의도는 <부활보고서>나 또는 목격담을 흥미진진하게 만들려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도는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인 초대 신앙인들로 하여금 신앙을 가지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또 교회 안팎에서 적들에 의해 유포되고 있는 거짓말을 대답하기 위해 기록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복음서 증언말고도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날>, 즉 '주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유대교의 성일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인 오늘날의 토요일입니다.
안식일의 특징은 모든 일을 금지하는 날이 이었다는데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특별한 관습에 대한 설명은 출애굽기20장에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11절)
안식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신 것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이 세상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성한 제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초기의 기독교 역사에서부터 벌써 기독인의 큰 날은 주일 중 마지막 날이 아니라 그 첫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의 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하던 중 안식 후 첫날 모였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설교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이 사실이 사도행전에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즉 주의 날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위한 정기적인 집회였습니다.
왜 그들이 전통적인 안식일 대신 안식 후 첫날에 모였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삶을 주관해오던 달력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거룩한 날을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에서 그 다음날로 옮긴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지시되었고, 조상 대대로 오랫동안 준수되어온 안식일의 날짜를 바꿨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생명을 뒤흔드는 사건, 즉 예수님의 부활이 안식 후 첫날이었음을 밝혀주는 증거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부활의 명확한 증거입니다.
확실한 것은 십자가가 제자들에게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강펀치였습니다.
그들은 체포될까 두려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고, 더 이상 제자라고 행세할 것을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특히 예수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과 모든 관계를 끊기 위해 저주까지 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일곱 주일 지난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해 군중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안전하게 도망가겠다거나 예수와 관계를 끊겠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오히려 잡혀가도 좋고, 심지어 죽어도 좋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도록 한 산헤드린에서 당당하게 심문을 받습니다.
아무 두려움없이 용감하게 그들에게 도전하였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 사도행전 4장18~20절 -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어떻게 비겁자가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리라고 마음먹는 사도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다만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합니다.
그 주간동안에 무엇인가가 일어났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이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부활의 증언을 부활사건이 있은 후 5년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증언이 생생한 때에 기록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부활의 주님이 되신 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부활 사실을 전파하는데 중심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살았고, 그 신앙 지조를 지키기 위해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 부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내가 부활한 주님을 목격했는데 왜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느냐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처럼 부활을 의심하며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할 수 있어?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부족한 신앙입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면서 또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에 무수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죽음이나 지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 가운데 있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부활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의 시간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미래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영생의 시간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어떻게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얻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미 부여받은 새 생명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새 생명이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미래의 약속을 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새새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단순히 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도 단순히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섬김도 단순히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러한 삶은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패러다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미래의 시간을 알고 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약속을 받고 있기에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부활 신앙인이란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살기가 참 어렵고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처럼 나도 부활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영생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건강하더라도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고난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우리의 삶은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오늘이 힘겹더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비록 오늘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비록 오늘이 실망스럽더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비록 오늘이 슬픔으로 뒤덮여 있다 할지라도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십시오.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우리의 내일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살 길이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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