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14)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
"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누가복음 24장 44∼53절 -
사람이 하늘에 올라간다는 일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비행기를 만들었고 우주여행의 장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어도 인간은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사람이 승천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에녹입니다.
창세기 5장(24절)에 보면 아담의 6대 후손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께서 데려 가셨다고 했는데, 히브리서11장에 에녹은 그때 하늘로 옮겨져서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절)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는 그의 제자 엘리사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길을 가고 있을 때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11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오늘 본문의 장면은 매우 특이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우시는 모습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40일이 되었을 때입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셔서 자신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셨습니다.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리우셨고,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이때 제자들은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사도행전1장9∼10절)
주님이 승천하신 장소는 하늘의 천군 천사가 주를 찬양하던 베들레헴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하고 모세와 엘리야까지 함께하던 변화산도 아니었습니다.
또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고 바위가 굴러나며 무덤이 열려 그의 신성을 보여준 그곳 갈보리동산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시대를 통해서 신비스럽게 빛난 호화스런 영광이 있던 성전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름 없고 보잘것없는 마을 베다니였습니다.
1.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昇天)하셨다
사도신경의 ‘하늘에 오르사! 하늘에 오르셨다’는 고백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주 공간으로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차원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라는 1세기 이후의 신앙인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방향과 위치를 여기, 저기 이렇게 말하고 정의할 수 있는 이 우주의 어떤 곳에 천국이 공간적인 장소로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지금 우리 곁에 다른 차원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여기서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한 몸으로 완전한 천국에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경험하고 거기에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할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해서 내 영혼에 죄가 사라지는 것을 가슴 뛰게 느끼며 고백할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누군가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진실로 섬겨주었을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오직 세상의 다른 가치는 다 사라지고 말씀의 은혜만이 있을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예수님만 보일 때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삶의 자리에, 교회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공간적으로 천국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재하시듯이 천국이 실재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구약에 나타난 에녹이나 엘리야의 승천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육적 상태에서 승천한 것이고, 예수님의 승천은 죽은 후 다시 살아나신 , 즉 부활 후 승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부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과 승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승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몸임을 입증하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참 뜻과 성격은 승천에서부터 밝혀집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그가 죽을 당시의 모습 그때의 몸을 다시 회생한 것이 아님을 승천사건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다시 이 땅에 매어야 할 그런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 차이가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죽기 전의 육체, 평범한 육체를 가지고 그대로 다시 살아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주적 의미를 갖도록 해줍니다.
우주적(宇宙的)이라고 해서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우주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달나라 정도만 생각하고 살았지만 지금은 화성은 물론이고, 태양계 저편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에 매달린 조그만 암석 행성입니다.
태양까지 거리는 1억5000만㎞, 빛의 속도로 8분 20초 걸립니다.
우리가 보는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별 중에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알파 센타우리'는 빛의 속도로 4년 4개월을 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나 띄엄띄엄 떨어진 태양들이 적어도 1000억개, 많게는 4000억개 모인 게 '우리 은하(Our Galaxy)'입니다.
우주에는 이런 별들의 집단이 다시 1000억개 넘게 있습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1977년 9월 무인 우주탐사선 보이저호를 쏘아 올렸습니다.
보이저는 발사 2년 만인 1979년에 목성, 이듬해엔 토성 상공에서 생생한 사진을 찍어 전송했습니다.
목성의 화산 활동 흔적, 토성의 고리…. 지구에선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획기적 영상들입니다.
보이저는 89년 원래 임무를 마쳤지만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발전기 동력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지난 2013년 보이저가 케이프커내버럴 기지를 떠난 지 36년 만에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星間) 우주에 진입했습니다.
태양계 마지막 행성 해왕성까지 거리보다 네 배 먼 190억㎞, 태양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완전히 넘어서 진짜 우주의 심연(深淵)에 들어갔습니다.
우주의 잣대로는 보잘것없지만 인간이 만든 물체로선 가장 멀리 갔습니다.
보이저의 동력은 2025년이면 바닥납니다. 그때까지 보이저는 계속 우주를 항해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보이는 생명이었습니다.
보이는 육체를 가진 보이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다음에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하늘과 땅을 통일한 생명입니다.
공간과 시간의 모든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부활사건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사건이었습니다.
공간과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일어난 승천사건이 부활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얼마동안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가 죽으셨다면 그냥 신화적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부활에 이어 승천하심으로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우주적 사건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하여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 승천(昇天)의 의미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예수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은 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한 예수가 그냥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에 의한 ‘구원 사건’이었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늘로 올려지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은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이 예수를 ‘경배(敬拜)’한 일입니다.
5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눅 24:52).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승천한 예수를 경배한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본 초대교회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제 1, 2계명이기도 합니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철저한 금지 사항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를 경배했다면 이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거나, 아니면 ‘예수’가 하나님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우상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그가 ‘참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신’ 후 그를 경배한 것입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1, 2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지킨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 온전한 경배를 올려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승천’이 가져다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모든 믿는 자에게 역시 저 세상의 삶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삶이 있음을 확신케 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협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덤일 것입니다.
가히 인간은 무덤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도 그 무덤 신세가 된다는 것으로 인해서 인간은 좌절하고, 전율하고, 더 이상 생의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단절해야만 하는 그 기막힘 속에서 미래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으로 이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죽음 후에 삶이 있다는 그 환희의 사실로 해서 모든 절망의 끈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승천은 불멸에 대한 보증입니다.
인류가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불멸에 대한 확실한 증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인간의 최후의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그 운명은 영원한 비극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또 그리스도처럼 새로운 세계 속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사건은 우리의 믿음에 큰 희망과 기쁨을 안겨 줍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승천으로 우리도 승천할 수 있고 또한 승천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며 목적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주님께서 먼저 체험하신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이 우리 각 사람에게 실현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허무,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절망입니다.
이기적인 신앙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부활 승천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다 값지게 살아서 아버지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소망입니다.
시골에 사는 어떤 부부 교사가 있는데 남편이 해외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 떨어져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내는 막막했습니다. 남편이 잠시라도 없는 세상은 도저히 못 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말하기를 자기가 먼저 가서 자리를 마련하고 그리고 아내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2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부인도 남편이 있는 곳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학업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승천은 바로 이런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합니다.
비록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에서 예수님 없는 평범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을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만 합니다.
52절과 53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예수님의 승천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저들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승천을 체험한 뒤 저들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우선 기쁨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큰 기쁨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큰 기쁨으로 예배의 자리로 나갈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로 예배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신 하나님께 예배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하늘 하나님 우편으로 올리신 주님께 예배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 이 성에 머물며 늘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기대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화롭게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상실하면, 성령을 소멸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입에서 찬양이 실종됩니다.
은혜가 회복되면 내 입에 찬양이 회복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이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해 가다 때로 슬럼프에 빠집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입에서 찬양이 사라집니다.
그것을 가장 괴로워합니다.
몸부림치며 믿음을 다시 되찾으면 제일 먼저 입에 찬양이 돌아옵니다.
성도는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 사는 것이 짜증스럽고 맥빠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라며 피곤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제자들은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성전에 모여 늘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경배하며 늘 성전에 모여 찬양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경배와 찬양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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