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장 1~9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3절 번역 비교입니다.
개역개정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공동번역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새변역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은 당을 짓는 고린도 성도들을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 불렀습니다.
'아직도'는 어떤 일이나 상태 또는 어떻게 되기까지 시간이 더 지나야 함을 나타냅니다.
또는 어떤 일이나상태가 끝나지 아니하고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동생이 아직도 잠을 잔다, 그는 아직도 청춘이다, 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등으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라는 말은 시간이 계속 되거나, 상태가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직도'라는 단어는 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을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믿기 전에 가졌던 삶의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 책망했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육신에 속한 자의 기준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 판단합니다.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기준으로 삶의 잣대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리더쉽을 본인 스스로 취사선택하여 누구는 바울파, 누구는 아볼로파 이렇게 파당을 짓고 분열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고정하도록 사람중심의 시선을 바로잡아 하나님중심의 신앙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1. 육신에 속한자(1∼4절)
바울은 대부분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영적인 사람처럼 대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육적인 사람들, 즉 영적인 아기들처럼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신의 사람”, 즉 '영적인 아기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은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신에 속한 자로 취급했을까요'
바울에게 고린도 성도들은 영적으로 어린 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 전파된 복음을 믿었으며, 성령을 좆아 살면서 영적인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성령을 좆지 않고 육신을 좆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영적인 아기들'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 아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영적인 아기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밥같이 단단한 음식, 즉 십자가의 비밀에 대한 더 깊은 진리를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젖과 같이 부드러운 음식, 즉 십자가의 핵심 내용만 간단히 요약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2절)
바울은 성도들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신령한 사람”, 즉 영적인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사람”은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믿고, 성령님을 좆아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좆아 살고,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 사람 “육적인 사람”은 원문에는 ‘사르키노이스(σαρκίνοις)’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육신’을 의미하는 ‘사르코스(σαρκος)’에서 온 말로서 바울이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육신을 재료로 만들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육적인 사람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 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육신에 속하였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쓰인 ‘육체’라는 말은 ‘세속적인 삶’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신령한 자와 같이 대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대하여야겠다고 합니다.
아직도 밥을 먹지 못하여 젖을 먹여야겠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은 육신에 속한 자와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고방식이 이 세상 사람들 하고 같기 때문에 이 세상을 따라 갑니다.
돈 좋아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고, 이 세상의 사람들과 똑 같이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사고 특성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부모가 어떤 희생과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로부터 베풀어진 것보다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러한 어린아이가 세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부모의 희생과 사랑 때문임을 이해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 어른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희생과 사랑에 의해서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라고 하면서 사람을 따라 행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가 바로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면 신령한 자, 즉 밥을 먹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히브리서 5장11∼14절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젖을 먹는 자는 어린아이인데 이들은 무엇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까?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중심주제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 즉 히브리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데도 환난과 핍박이 계속되니 자기들이 무언가 부족한 것으로 여겨 자꾸만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완전하고 완벽한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단한 식물을 먹는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성을 믿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0장10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것을 자꾸만 초보적인 수준으로 이야기하고 고급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신비한 체험을 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령한 사람, 즉 영적인 사람은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변환된, 즉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사 문제로 시끄러웠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2. 바울파와 아볼로파(5절)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는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들의 세상적인 삶의 방식이 교회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당을 지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며 자신들의 지도자가 최고라고 내세운 것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자들은 창시자들의 이름을 따라 플라톤파, 아리스토텔레스파, 스토아학파, 에피쿠레스학파로 나뉘어서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고린도교회도 헬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그들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심으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갈라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다른 그룹보다 더 낫다고 자랑하려 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라고 말하는 것은 육신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희를 보니 어찌 사람이 아니리요!
어찌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추종하든 아볼로를 추종하든 그들 모두 ‘아직도 육에 속한 자’라고 책망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를 자랑하는 것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각각 사명을 받은대로 사람들을 믿게 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바울에게 깊은 존경과 친밀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부모와 자녀들이 영적인 유대감을 갖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감이 지나쳐서 분파를 이룰 정도가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결코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볼로 역시 바울의 후임으로 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습니다.
아볼로 역시 그리스도를 전했고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복음을 전한 방법은 지혜를 추구하던 헬라식 사고에 익숙해진 회중들에게 더 친근하고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보다 아볼로에게 더 친밀감을 가진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성도들은 바울을 좆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좆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더 발전해서 그들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이 아닌 사람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서 서로 시기하고 싸우는 것은 그들이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후반부에서 성령의 열매와 육신의 열매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시기와 분쟁'을 육신의 열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열매 중에 하나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분쟁'은 육신을 중심으로 할 때, 자기중심으로 살 때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지할 때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그들이 육신을 좆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역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바울은 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떠난 다음에 아볼로가 와서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은 생명을 심는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식물이 자라는데 물을 주는 사람입니다.
믿은 자들이 영적으로 자라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3.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6∼7절)
영적으로 물을 준다고 해서 다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그분의 방법대로 사람을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이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뿐이다.’는 것이 바울의 영적인 관점입니다.
육체를 지닌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나 능력이나 가문을 자랑하는 것과 동일하게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울의 영적인 관점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이 바울의 영적인 관점입니다.
바울은 이 영적인 분별로써 고린도교회의 위기를 보았습니다.
영적인 관점으로 육체의 관점으로 인한 교회의 위기를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씨 뿌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씨를 뿌렸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합니다.
도구는 집을 짓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다 짓고 나면 그 도구들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그 집을 지은 사람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도구가 아니라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건물을 지은 사람에게 공로와 영광을 돌립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이요 하나님의 밭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 집이 세워지면 그 집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도구로 사용된 자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에 쓰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한국 교회는 수없이 분열하고 분쟁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수많은 교파들이 존재하며, 같은 교단 내에서도 분쟁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뿐 아니라 같은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분쟁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적으로 은사를 자랑하고 분당을 만들어서 서로 시기하고 다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나는 신앙의 성숙도에서 영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육신을 좆아 사는 육신적인 사람입니까?
나는 성령을 좆아 사는 영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내 뜻과 능력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육신적인 사람입니까?
나는 아직도 하나님보다 내가 가진 무엇을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나보다 덜 가진, 덜 배운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멸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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