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5) - 하나님의 비밀 /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가족사랑 2025. 3. 2. 19:25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8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흔하게 경험하는 갈등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자기 생각이나 방법대로 할 것인지에 대한 갈등입니다.

이런 갈등을 하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보편적인 상식이나 지식으로 이해하기 어렵거나 받아들이기 곤란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기보다 쉽게 따를 수 있는 자기 방법이나 인간적인 방법을 따릅니다.

그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려가 재단 위에 올려놓고 칼로 내리치는 행동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  하나님의 방법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방법도 전혀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헬라 세계는 지혜를 숭상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 철학자 그리고 웅변이나 수사학에 능한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추종했고 이들의 지혜와 웅변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도 지혜자나 웅변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를 비롯한 헬라세계의 많은 교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 역시 지혜와 언변이 뛰어난 교사나 전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혜롭고 유창한 말로 많은 추종자들을 확보했습니다.

고린도에서 활동했던 아볼로도 아마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아볼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24절).

그런데 바울은 당시의 지혜나 웅변을 내세운 교사나 전도자들과 달랐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의 지혜나 뛰어난 언변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순수하게 전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꺼려했고 이방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지혜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으로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지혜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도 당시 고린도에 있던 어떤 사람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다른 이야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이야기 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십자가 외에 매우 다양한 주제들, 즉 인간론, 죄론, 성화, 부활, 재림, 심판, 성령, 그리고 윤리와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자신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이야기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모든 메시지의 핵심에 십자가를 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다룬 모든 다양한 주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지 않았다면 다른 주제들은 전혀 가르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즉 인간의 공로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주신 구원의 길에 대해서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핵심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 본질적인 고통과 불행의 원인인 죄에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구원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닙니다.

구원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18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 사랑 가운데 성취되어져 가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영원한 계획을 이루시는 통로라면, 십자가는 그 통로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몇 년을 신앙 생활을 하였더라도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입니다.

성경을 알고 기독교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교훈들과 행적들에 대해서 안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알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도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살아가는 우리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선물입니다.

 

십자가형(Crucifixion)

원래 십자가형은 로마 사람들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사람들이 고안해낸 처형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후에 카르타고 사람들이 배워서 더 발전시켰고 로마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이 처형방법을 “가장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처형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행해지지 않았고 오직 로마가 정복한 지방들에서만 행해졌습니다.

특별히 노예 신분이나 극악한 범죄자들에게 행해졌습니다.

당시 참수형은 고통이 가장 미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계급이 높은 시민 사형수들에게 행해졌습니다.

가혹함에 있어서 중간 정도되는 사형 방법은 산 채로 화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 가장 가혹한 것이 십자가 형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는 대개 탈진으로 죽게 되었는데, 길면 9일 동안이나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있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죽음은 저주스런 죽음으로 간주되어 사형수를 장사 지내주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땅에 묻을 가치도 없다고 여겨서 새들이 시체를 뜯어먹어 없어지기까지 매달아 두었던 것이 일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방에서는 달랐습니다.

유대 지방에서는 로마의 총독들이 모세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존중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고 매달려 있을 때, 병사들이 와서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단축시켜 빨리 죽게 하는 조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형수들에게는 일종의 자비 행위일 수 있습니다.

다리뼈를 꺾게 되면 다리로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양팔에 의지하게 되는데, 양팔이 최대한 벌려지면서 횡경막을 압박하게 되고 결국에는 질식하여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여러 형태의 죽음이 있는데 왜 주님은 유독 이런 가혹하고 잔인한 형태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들림을 받으시는 죽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14∼15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한복음 12장32~33)

이것은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명기 21장22~23절)의 말씀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모세 율법의 이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에 십자가 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에 다는 행위는 그 자체가 저주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어야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의 죽임어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저주의 죽음으로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실 모세 율법에 이런 조항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성격을 이미 14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고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율법 규정을 직접 인용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설명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4a).”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저주의 죽음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저주는 본래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처한 실상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 그것은 이미 죄인들 위에 임하여 있는 부인할 수 없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 성경의 엄중하 선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우리는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신다는 참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던 것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한복음 5장39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구약 성경 전부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성경을 성취하기 위함이라는 구절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셨을 때의 일입니다.

제자들은 구약 성경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2장17절).

이것은 시편에 나온 다윗의 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편69편9절)

이 시편의 구절은 주님 오시기 1000년 전에 다윗이 쓴 시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주님을 예언한 것임을 제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가룟 유다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암시하시면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한복음 13장18절)

이것도 시편에 있는 다윗의 시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편 41편9절)

이처럼 예언 성취라는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사건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를 통해서 그 의도적 강조를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쓰는 요한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묘사할 때 강조하려고 한 것은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크셨는지 혹은 십자가 형의 잔인하고 끔찍한 집행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만족할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주님의 죽음을 곁에서 목격한 증인으로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 죽음이 구약에 예언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네 번에 걸쳐서 그는 그것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 인류에게 죄 문제 해결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의 부활로 인류의 구속(救贖)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죽음에서의 부활은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사랑으로 성취하신 위대한 승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1서 4장9~1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는 2000년 전에는 단지 죄인을 죽이는 형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었음을 회고하고 또한 용서받은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따라 살아감으로써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십자가 사건에 직면함으로써 경건을 배웁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떨리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또 십자가에서 나타난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에 감격함으로써 복음의 비밀인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바울이 택한 전도방법은 사람의 지혜나 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을 전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도할 때 사람의 지혜로운 방법이나,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말로 전도하면 더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란 단순히 사람을 지혜로운 말로 설득해서 교회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복음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람의 영혼에 관한 일입니다.

구원에 관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말의 아름다움으로는 안 됩니다.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는 죄 사함과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여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 전도의 목적입니다.

여러분의 전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