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1)-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가족사랑 2025. 2. 1. 08:21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

□고린도전서 1장 1~9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쓴 첫번째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주후 50년경에 제 2차 전도여행을 하던 사도바울이 고린도 지방을 방문해서 그곳에 있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론했는데 그때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반대와 배척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머문 1년 반 동안 많은 회심자를 얻고 또한 회당장까지 회심하는 놀라운 결과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들과 함께 세운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이때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를 위해 동역한 사람 중에는 장막을 만드는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리고 베뢰아에서 맡은 임무를 마치고 합세했던 실라와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교인들 간에는 분쟁이 있었고, 근친상간의 문제, 소송문제, 음행문제,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 예배와 부활, 그리고 연보문제 등,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다 안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한 문제에 해답을 주고자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는 초대교회 당시 교회와 교인들이 처해 있던 삶의 현장에서 발생했던 문제에 대한 바른 신앙의 모습과 자세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은 복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성도로서의 신분까지 상실할 위기에 있던 성도들에게 성도의 신분을 다시 상기시켜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 절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이라고 했습니다.

2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했습니다.

3절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4절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5절에도 “너희가 그 안에서”(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했습니다.

6절에도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7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절과 4절에서 은혜와 평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3~4절)

여기서 바울은 그냥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자마다 멸망을 받지 않고 구원에 이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모든 일에 풍족해진 일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바울은 여기서 ‘모든 일’을 두 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구변’과 ‘지식’입니다.

구변(口辯)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라는 말인데 이 말의 뜻은 "교리" 혹은 "진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지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그노세이"(γνώσει)라는 말인데 이 말은 세상의 잡다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서 3장 8절에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진리를 알고 교리를 바로 아는 것에 풍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세상의 지식에 풍족하기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진리를 알고 바른 교리를 알고 그 지혜가 풍성한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절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고 예수 안에 거하는 나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 풍족해지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잠시 고난의 징계가 닥쳐도 이것이 결국은 더 큰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도 나를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한 잠시 잠깐의 훈련일 뿐, 결코 영원히 계속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난 가운데 소망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처럼 이성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에서 조화를 잘 이루어 풍족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이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단에 빠지거나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습니다.

 

둘째는 고린도 교회의 교우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는 많은 은사를 체험한 일이었습니다.

7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이 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가운데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라는 말씀은 은사 충만의 신앙생활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마(καρισμ)라고 하는데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절대적인 권위. 신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은사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받은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은사를 주셔서 무엇이든지 가능하게 하고, 큰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은혜와 은사는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가 자신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면, ‘은사’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도 충만해야 하고, 은사도 충만해야 됩니다.

사탄의 역사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특별히 은사 충만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첫째로,  은사 충만의 신앙생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살게 합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린도전서 1장7절)

‘기다림’이란 사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필요로 할 때 간절히 갈망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을 굳게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것을 갈망했습니다.

은사가 충만한 사람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모든 일에 예수님을 앞세우고, 또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은사를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은 항상 주님의 능력이 그의 생활 속에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린도전서 12장31절)

 

둘째로,  은사 충만의 신앙생활은 견고하게 합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8절)

‘견고하게’는 헬라어로 베바이오세이(βεβαιώσει)로,  ‘붙들어 매어 고정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예수님께 붙들어 매어 고정시키고 은사 충만의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심으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시도행전20장24절)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은사 충만한 사람은 담대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7절)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나타나심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아포칼립신(ἀποκάλυψιν)입니다.

'아포칼립신'은 '뚜껑을 열다, 수건을 벗긴다'는 뜻으로 계시’(revelation)를 가리킵니다.

마틴 루터 성경도 계시라는 의미의 독일어 ‘Offenbaru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직역에 가까운 KJV은 단순하게 'the com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의역에 가까운 NIV는  '계시되었다'는 뜻으로 ‘to be revealed’라고 번역했습니다.

'오심( coming )과 계시(revelation) '는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심'은 우리 눈앞에 실제로 나타나는 성격이 강하고, 계시는 초월적이면서 신비적인 느낌이 강한 단어로 들립니다.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쓴 바울은 예수께서 살아있을 때 사실은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교에 열광적으로 몰두했습니다.

그런 열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교의 중심인물로 부상했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토대를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지도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정확하게 알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놓았습니다.

이 구절에 나온 단어인 ‘계시’가 바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7절에 ‘나타나심’으로 번역된 ‘아포칼립신(ἀποκάλυψιν)’입니다.

바울이 받았다고 말하는 계시의 실질적인 내용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 목격자들의 목록을 제시했습니다.

자신을 목격자 목록에 포함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장18절 -

 

바울이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세 번(9장, 22장, 26장)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 부활의 주를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메섹 이야기는 바울의 아주 특별한 영적인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사도행전9장19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주 진지하게 아주 간절하게 소망을 가지고 재림(再臨)을 기다렸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우리와 다름없이 욕심이 많은 욕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가 된 후에도 자기의 이익을 찾기 위해 법정에서 고소를 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세를 불리기 위해 바울파, 아볼로파 하며 파당을 짓기도 했습니다.

육체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음행을 하기도 해서 교회 안에서 큰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참된 소망, 즉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소망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욕망의 사람과 소망의 사람이 있습니다.

욕망이나 소망이나 비슷한 말이지만 이 세상의 어떤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사는 사람을 욕망의 사람이라고 하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주의 재림을 위하여 기다리고 사는 사람을 소망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 더 잘살아 보려고, 좀 더 행복해 보려고, 좀 더 재미있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고 나름대로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지 않는 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런 욕심들을 가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욕망에 상한선이 없다는 점입니다.

천석꾼이 되면 만석꾼이 되고 싶고, 28평에 살면 34평이 더 부러워집니다.

이런 욕심이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한선이 필요합니다.

돈도 얼마 이상은 가질 수 없게 하고 집도 몇 평 이상은 가질 수 없게 하고 교회도 숫자를 정해서 큰 교회가 자꾸 큰 예배당 지어서 수만 명씩 모이지 않게 하는 그런 상한선이 필요합니다.

욕망에 상한선이 없으니까 한없이 욕심을 부리고 그러다가 문제가 터집니다.

 

어떻게 이런 욕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 세상의 허망한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일장춘몽과 같은 이 세상보다 영원한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은 송대(宋代)의 『후청록(侯鯖錄)』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한바탕의 봄 꿈'이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부귀영화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덧없는 삶을 한탄할 때 사용됩니다.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신약과 구약성경은 재림(再臨)의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1,845절이 재림에 관한 말씀이고, 신약성경에는 318절이 재림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에 관해서 매 30절에 한절 꼴로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27권 중에 23권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빠진 4권중에서 3권은 한 장으로 된 성경으로 개인에게 한 편지이고, 남은 한 권은 갈라디아서인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제로 쓴 책입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은 모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림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셔서 이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초림(初臨)의 예수님을 기다렸다면, 우리들은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고린도전서 16장22절 -

우리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