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2)-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가족사랑 2025. 2. 2. 06:43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성지순례를 가셨다가 요단강을 구경하고 나서 마음속에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물을 좀 떠가야겠다. 교회로 가지고 가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물을 가져다가 우리 교우님들 세례 주어야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 요단강 물로 세례 주면 얼마나 은혜로울까?’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요단강으로부터 강물을 가져다가 그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의미를 생각하고 전하고 세례를 주었으니 그 세례식이 얼마나 은혜로와겠습니까?

그래서 재미를 붙인 목사님이 몇 번 더 요단강 물을 가져다가 그 교회에 세례를 주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교회는 요단강 물로 세례 받은 사람이 꽤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우들끼리 얘기하다가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이래봬도 요단강 물로 세례 받은 사람이야. 당신은 한강물로 받았잖아.” 그러더랍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 내에 요단강파와 한강파가 생겼습니다.

이 말을 듣고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다음부터는 요단강 물 가져 오는 것을 중지했답니다.

성지순례 갔다가 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들이 물 뜨다가 다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작은 자랑거리, 그걸 근거로 해서 갈아지고 파벌을 만들면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 10절에 보면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권면의 말을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볼로에게 속한다. 또 나는 게바에게 속한다. 또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고 서로 교회의 지도자들을 내세우면서 파당을 세웠다는 것입니다'(11~12절).

바울은 이들을 다 싸잡아서 분쟁으로 교회가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을 가진 같은 말을 하는 하나의 화합된 공동체로 연합하라고 간곡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1.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11절)

고린도 교회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은 바울이 들은 뜬소문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성도가 전해준 사실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들은 소식이  '글로에의 집 편'에 근거한다는 걸로 신빙성이 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바울은 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고린도 교회 분쟁이 나타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2절)

여기 언급된 이름은 모두 고린도 성도에게 잘 알려진 인도자들입니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고 인도했던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한 목사입니디.

아볼로는 그 뒤를 이어 교회를 양육한 목사입니다.

게바(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자 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입니다.

당시 분쟁은 인도자 사이에서 일어난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이들끼리 경쟁이나 갈등은 없었습니다.

바울은 아볼로를 교회에 물을 준 인도자로 인정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린도전서3장6절)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고린도전서16장12절)

바울이 아볼로와 불편한 관계였다면 이렇게 하기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편지에서 바울을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베드로후서3장15절)

바울과 베드로 또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문제의 현상은 인도자가 아니라 성도들 간에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이 추종하는 인도자에 따라 편을 나눠 갈라선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그룹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자칭 바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입니다.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목회자입니다.

자신들이 바울에 속한 자들 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 교회를 개척한 멤버들이 주축이 된 그룹입니다.

교회의 주류들입니다.

아마 고린도교회가 네게의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된 동기도 바울에 속했다고 말하는 이 그룹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척 멤버들이고, 처음부터 교회를 섬겨 온 주류라고 주장하며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기득권을 주장하며 그것을 잃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래 동안 교회를 섬겨온 사람들, 교회 토박이들, 소위 주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더욱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기득권을 행사하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자칭 아볼로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좋아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며 좋은 평판을 얻은 사람입니다.

자신들이 아볼로에게 속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류파인 바울에 속한 자들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그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류파들에게 맞서 당시에 인기를 얻고 있던 아볼로의 후광을 업고 고린도교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했던 그룹입니다.

새로 교회에 들어와 열심을 내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교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기존 성도들의 견제세력을 형성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은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앞서 교회를 섬겨온 분들의 수고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기꺼이 협력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에 활력소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게바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게바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자신들은 게바에 속했다고 한 자들은 아마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주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배우고 삼년동안 동행하며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의 신앙전통을 이어받은 정통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은 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바울파나 아볼로파를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게바가 고린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가 고린도로 이사하여 고린도교회의 성도가 된 이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마 이들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들었기에 좀 특권의식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흔히 뿌리 깊은 믿음의 가문에서 전수된 신앙을 이어받으신 분들은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에 빠져 은근히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있습니다.

뿌리 깊은 신앙의 가문과 전통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분들은 선민의식을 경계하고 늘 새롭게 되기를 힘씀으로 역시 다르다는 인정과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네 번째 그룹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출발은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누어져 서로 분쟁하자 이것저것도 다 싫어서 이런 그룹에 속하지 않고 초연하게 신앙생활 하려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서로 나누어져 다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은 좀 더 깨끗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성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또 다른 분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개혁해보고자 하는 의도와 뜻을 지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다 잘못되었고 자기들만이 의롭고 깨끗하다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이 또 다른 분열을 조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교회의 연약함이나 잘못을 고치고 바르고 의롭게 해보고자하는 뜻을 품으려면 자신만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역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자신에서부터 새롭게 되고자 힘씀으로 정말 교회를 새롭게 하고 하나 되게 하는데 좋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이처럼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져 분쟁하는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새번역)

이 질문들의 정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그리스도는 나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갈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뉘신 것처럼 그 몸인 교회를 나누었습니다.

바울, 아볼로, 게바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례를 그 인도자들 이름으로 받은 것처럼 행했습니다.

바울은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질 수 없듯이 교회도 나누어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는 분파를 전혀 두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파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서 분쟁의 잘못을 꾸짖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 반문합니다.

바울 자신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지 않은 이상 바울에게 속한 교회나 바울에게 속한 성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는 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직접 세례를 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직접 세례를 준 자가 많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을 부당하게 높이는 꼬투리를 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스데바나는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사도행전16장15절).

사도행전 16장27절에 관한 두 개의 후기 사본들은 스데바나를 빌립보의 간수와 동일시합니다.(참조: NIV; PEB; WEB)

그리스보는 고린도의 회당장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사도행전18장8절)

가이오는 바울이 머문 집 주인이었습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로마서16장23절)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울이 만일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면 그들은 바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바울은 세례 준 사람이 많지 않음을 감사한 후에 근본적으로 자기의 사명은 세례 주는 데 있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유일한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모든 교회, 모든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이유로서도 교회는 나누어질 수 없고 분쟁해서는 안 됩니다.

대개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 교리 문제라기보다 주도권 문제입니다.

인간 중심의 세력 다툼 때문에 갈라집니다.

자기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명예심과 허영심 때문에 서로 헐뜯고 비난하게 됩니다.

신앙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호소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가 왜 서로에게 벽을 세웠는지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을 다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해박한 지식에 매료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웅변력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그래서 어떤 설교자에게 애정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자기 문화, 역사, , 전통, 민족성을 잘 이해해 주는 지도자에게 더 큰 동질감과 친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해산의 고통으로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수고하며 길러준 아버지 같은 인도자에게 더 큰 정과 사랑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에 끌린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끌린 것입니다.

중심이 사람에게 그리스도에게서 옮겨지면, 설교자가 선포한 메시지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느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중심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옮겨지면 누가 설교했느냐가 더 중요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달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모두 같은 말을 하고 분쟁이 없이 온전히 합하라

1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권하노니'는 헬라어로 파라칼로(Παρακαλῶ)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격려하다, 권고하다’는 의미로 좀 더 강조해서 간청하다, 탄원하다는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권하노니'는 강한 권면을 하려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는 공동체가 분열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고 상호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있을 때 사용됩니다.

'분쟁이 없이' 는 헬라어로 스키스마타(σχίσματα)인데, 이것은 옷이 찢어진다거나 차이로 일어나는 분쟁등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각기 다른 지도자들이 다름으로 인한 분열을 가르킵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 서로 느낌이 달라 당을 짓는 형편을 묘사합니다. .

‘온전히 합하라’는 헬라어 동사 카테르티스메노이(κατηρτισμένοι)는 어떤 것을 올바른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부들을 부르실 때 어부들이 그물을 수선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마태복음4장21절)

이 단어는 신앙의 부족함을 채운다는 정신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3:10)

여기에서는 고린도교인들이 하나의 온전한 통일된 몸을 이루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온전히 합하라’는 말은 의학 용어로서 부러진 뼈를 접합시키거나 어긋난 뼈를 제 자리에 맞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온 몸을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빠른 시간 내에 뼈를 맞추어야 합니다.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하는 연합(聯合)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과 같은 마음, 곧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이고 이타적인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두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 같은 말을 하십시오!

한 마음, 한 뜻이 되십시오!

예수님은 채찍에 심히 맞고 모욕적인 일들을 당했습니다.

당신 스스로 십자가를 질 수 없어서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에게 대신 들고 가게 해야 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결국 숨질 때까지 치욕과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웃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복음23장34절, 새번역)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분쟁 가운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분쟁의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수많은 교회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성경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남긴 서신서입니다.

주후 90년대 중후반 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이 글은 일반적으로 클레멘트 일서(Clement I)’라고 부릅니다.

이 서신은 클레멘트가 고린도교회에 보내기 위해 작성한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클레멘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 분쟁 문제를 다룬 뒤 약 40년 후에 고린도 교회에 또 편지를 써서 남아있는 분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클레멘트는 교회를 대표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편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고질적인 문제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 Romanus, 30-101년경 -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 중심에 자신을 두지 마십시오.

인도자도 두지 마십시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두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우리 안에 분쟁은 사라지고 온전히 합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분열될 것입니다.

모두 다 같은 말을 하고, 한 마음, 한 뜻이 될 때 교회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의 본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