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4) -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가족사랑 2025. 2. 16. 17:39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고린도전서 1장 26~31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헬라어로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나와서 모여 있는 거룩한 무리들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불러내셨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장9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두움 속에서 불러내어 주셨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영적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무엇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도 모르고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빛 가운데로 불러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자리에서 불러내어서 의인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의 자리에서 불러내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탄의 종의 자리에서 불러내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멸망받는 지옥에서 불러내어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로운 부르심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바로를 피해 도망해 장인의 양치기 일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장인의 양떼를 치며,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양치기 살면서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언변이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모세가 의기 양양 기세 등등 했을때 주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낮아질때로 낮아진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그런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후에는 신령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감돌았습니다.

이스라엘 60만 장정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낼 영도력이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광야생활 40년 동안의 온갖 어려움과 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받기 전의 모세와 부르심 받은 후의 모세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후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무척 의미 있고 보람된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1.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오늘 성경 2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Brothers, think of what you were when you were called.

가르 아델포이, 블레페테 텐 클레신 휘몬(γὰρ ἀδελφοί, Βλέπετε τὴν κλῆσιν ὑμῶν.)

부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신(κλσιν)은 하나님의 주체적이고, 동적인 모습이 강조된 말로서 고린도교회의 부르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보라의 헬라어 블레페테(Βλέπετε)는 문법상 직설법으로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명령형으로 봅니다.

'부르심을 보라'는 것은 '부르심을 어떻게 받았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너희가 구원받았는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구원이요 선택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과 선택에 관한 교리는 기독교에 있어서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상해서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이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선택하고 만나 주셔서 육적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 않지만 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믿고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여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의 거의 대다수가 세상의 학문을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제자들 중에는 의사 누가,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 최고 선생에게 배운 바울, 산헤드린 관원인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제자들이 세상의 학문을 많이 배우지 못한 갈릴리의 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와 같이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사도행전 4장13절)

세리인 마태와 같이 멸시받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태복음 9장9-11절)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재물과 권세가 없는 자들을 택하여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볼 때 학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나 신분이나 문별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가난했습니다.

신분도 낮았고 무식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육체를 따라’란 말은 세상적인 명예나 부나 건강의 입장에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있는 자'는 헬라의 철학자들처럼 높은 교육을 받은, 지적으로 세상지식에 풍부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자를 가리킵니다.

'능한 자'는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자로 신분이 높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를 가르킵니다.

'문벌인 좋은 자'는 사회적으로 상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가르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세상적으로 볼 때 학식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나 신분이나 문별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빈곤하고 천한 시민들이었습니다.

노예들과 해방된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2.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부르셨을까요?

그 해답은 27절에서 29절까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네 가지의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미련함, 약함, 천함, 없는 것입니다.

위대한 부흥사로 쓰임 받은 무디 목사는 이 네 가지를 하나님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사람을 지혜롭게 만듭니다.

 

무디는 구두 수선공으로 무식한 사람입니다.

드와이트 레이만 무디(Dwight Lyman Moody)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노드필드(Northfield)에서 가난한 석공인 아버지 에드윈(Edwin Moody)와 어머니 벧시(Betsy Holton)사이의 아홉 자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습니다.

이 가문은 오래 전 영국에서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미국으로 온 가문이었으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무디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디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돈을 벌어야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무디는 못 배운 것이 평생 그의 괴로움이 되었으나 믿음으로 극복해냈습니다.

17살 때는 외삼촌이 경영하는 보스톤의 구두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1855년 4월 21일, 무디가 보스턴에 있는 교회에 나간 지 1년이 지난 때 그의 교사-목장 리더였던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무디의 영혼을 걱정하던 그는 직접 구둣방으로 찾아와 깊은 영혼의 대화를 나누게됩니다.

그날의 대화가 무디의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학력에 대한 열등감, 가난에 대한 보상심리, 신분상승 욕구 등의 깊은 마음 속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실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었으나 사랑이 없이 예수님이 죽으셨겠느냐는 말씀에 깊은 감격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킴볼의 열정과 사랑이 무디를 믿음의 인물을 만들어내었고 무디는 그날의 대화와 영적체험을 평생 잊지 못하고 그날을 생일로 정했습니다.

그는 구원의 감격으로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1837년 2월 5일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월 21일은 성령으로 제 영혼이 거듭난 생일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구두방 점원 무디가 신앙의 큰 인물, 무디 목사가 되었습니다.

무디는 따로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으나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 개인적으로 열심히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을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습니다.

이후 무디는 개인전도로,  일평생 몇 백 만명을 전도하게되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잠들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무디는 자신이 유식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무능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그대로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식한 무디를 유식하게 만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르심의 방법을 사용하심으로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외적인 조건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보다 오히려 미련한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잘 안 씁니다.

그래서 일부러 세상에서 평가할 때 무능력하고, 예의 없고, 이기적이고, 못되고, 형편없이 약한 것들, 버림받은 자들을 택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지혜나 권세, 부귀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것들을 흠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버리시고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십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부귀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합니다.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믿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반면 세상적으로 무식할지라도 십자가의 도 즉, 구원의 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고 믿는 성도들은 세상에서 지식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그들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에서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자들을 통해서 권력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무시할 때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나 같은 무식한 것을 하나님이 쓰시니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세상 적으로 볼 때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이 방법이 순리며 진리입니다.

이사야 55장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8∼9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 높아서 인간이 감히 추측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같이 부족한 사람을 택했습니다.

영적인 눈을 열고 보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흠있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셨습니까?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절).

한 마디로 '잘난척하지 말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당한 사람보다 스스로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을 선택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쓰십니다.

 

3.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는 우리를 선택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 까닭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은 없지만,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왜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시키는 모든 축복이 주님께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30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없는데, 그분이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우리에게 의로움이 없는데 그분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함이 없는데 그분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으며,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데 그분이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자랑이 되시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서 자랑하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이 자랑하는 것은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죄로 영원히 멸망할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고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큰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또 세상에서 제일 큰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의 사건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피의 복음을 성령으로 전하여 멸망하는 영혼을 지옥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큰 뜻을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큰 뜻, 즉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는 방관하거나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되는, 하늘과 땅과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류 역사 속에 꼭 해야 할 제일 큰일입니다.

세상에는 지혜롭고, 능력있고, 문벌 좋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나 같은 연약하고 별 볼 일없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나 같은 것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며 부르심에 감사하며 복음 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