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강해

고린도전서 강해(3) - 십자가의 도(道)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가족사랑 2025. 2. 9. 07:53

십자가의 도() - 하나님의 능력(能力)

□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슬람교의 경전을 <꾸란>이라고 합니다.

꾸란에서도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꾸란에서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1. 십자가(十字架)의 도()  - the message of the cross

기독교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十字架)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사형 도구로 저주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장13절)

그래서 로마 시민이나 일반 사형수에게는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비천한 노예나 흉악범에 한하여 십자가형이 가해졌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라 할 때, “”(로고스)는 말씀, 명령, 교훈, 가르침, 교리, 관하여 말한 것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사용된 것은 단순한 로고스( λόγος )가 아니고, ‘호 로고스(  λόγος)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하고, 십자가가 보여주는 그 말씀’, ‘그 교훈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씀하는 '그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은 공의(公義)로우신 분임을 알게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결코 죄를 방관하거나 간과하거나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신명기 32장4절)

‘죄()’의 사전적 의미는 ‘양심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로써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일반사전적 의미에서의 '죄'와는 사뭇 다릅니다.

'죄'라고 번역한 헬라어 하말티아(ἁμαρτία)는 히브리어로 ‘관녁을 맞추지 못하다, 표적을 빗나가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타(חטא)'입니.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이 만드신 그 창조의 위치와 순리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것 ,또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순종함에 부족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16∼17절)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선민들이 지키도록 여러 가지 규례와 규범들을 주셨습니다.

이것들을 지키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말씀하는 '그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속성와 함께 사랑의 속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장9절)

하나님의 이 사랑이 죄인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대속법입니다.

율법 아래서 죄인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대속법입니다.

대속이란 죄 없는 자가 죄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위기 4장13∼15절)

율법시대에는 무죄한 짐승이 죄인을 대신하여 희생됨으로 죄인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 4장20절)

구약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즉 모형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01절에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율법으로 드리는 제물은 그림자요,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도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데,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신비한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For the message of the cross is foolishness to those who are perishing, but to us who are being saved it is the power of God.

ρ μν λόγος τοσταυροτος πολλυμένοις μωρία στίν, δτος σζομένοις μν δύναμις θεοῦ ἐστιν."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명하게 두 가지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리석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처형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정 받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개죽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즉 삶의 능력입니다.

이 사실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낮은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운명에 떨어졌던 예수님을 택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단순히 교리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깨닫고 믿는 사람은 자기에 임하는 어떤 운명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삶의 능력입니다.

이에 반해 우리가 절대적인 능력으로 간주하는 돈은 삶의 방편은 되지만 능력은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예수님을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추앙합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수 안에 십자가가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능력이 없습니다.

 

22∼24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어려운 일을 기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헬라인은 새로운 지식을 찾아 헤맵니다.

거기에 살길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치욕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미련한 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너무나도 능력이 없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는 가장 악랄한 죄인에게 내리는 사형틀이었습니다.

“자신도 십자가에서 건져낼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바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당시 십자가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을 때 사람들에게조롱받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3942절)

 

 

정말 예수님은 남을 구원할 능력은 있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 능력이 없으신 분이셨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임을 당하신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셨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비밀과 십자가의 신비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비밀이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왜 그렇게 무능한 사람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그렇게 무능한 사람처럼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언제 이러한 계획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계획을 세웠을까요?

하나님은 언제 그러한 구원계획을 세우셨을까요?

 

성경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세우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8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창세 이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1장에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을 세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3∼6절)

 

하나님께서 이 우주만물과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건은 예수님이 무능해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생각 속에 계획되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이전의 수 천 년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경에도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아주 구체적인 사항까지 수없이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옆구리가 창에 찔릴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편22편16절)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가질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시편22편18절)

 은 삼십냥에 그의 제자에게 팔릴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스가랴11장13절)

 

예수님에 관한 가장 명확한 예언은 이사야 53장 전체입니다.

이사야 53장37절은 특히 명확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실 때에 자신이 어떻게 죽으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예언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33∼34절)

 

이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주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언되었고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도 예언되었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셧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시 아들을 구원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영원히 단번에 해결하시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이유가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 사함의 특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라고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만 부활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2:31)

(3) 그리스도 안에서만 심판대에 담대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4)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한 천국에서 왕 노릇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계20: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는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며, 영원한 반석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앙과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 하고, 전해야 하고, 자랑해야 할 분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뿐입니다.

 

 

로고는 기업이나 단체를 말해줍니다.

기독교의 로고(상징)는 무엇입니까?

초기부터 십자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좀 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십자가는 언제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십자가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호의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과 고통을 연상케 하는 이런 불쾌한 이미지를 지우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지성적이고 세련된 사람들의 감수성을 불쾌하게 하는 야만적인 개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십자가 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가 현실적 종교임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십자가가 고통과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인생의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죽어 가는 세상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에 대해 일깨웁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감춰진 영광입니다.

이 어둔 세상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는 항상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징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미련하고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