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137)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로마서 16장 9∼16절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르바노와 스다구'는 앞서 나온 '암블리아'의 경우 처럼 본문에서만 그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 ‘우르바노(Urbane)’라는 이름은 로마의 노예의 이름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황제의 종의 이름으로 ‘우루바노’가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르바노'는 가이사의 가족명부에서 발견되는 노예의 이름입니다 (Hendriksen).
그리고 앞서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고 말한 직후에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루바노'는 ‘암블리아’와 서로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시작은 로마의 노예였지만 나중에 출세는 대단했습니다.
암블리아는 황족의 가문에 속하게 되고 우르바노는 황제의 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는 우르바노가 암블리아보다 연상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들을 부를 때에 암블리아게는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라고 표현함으로써 그가 바울보다 한참 연하임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그렇지만 ‘우르바노’의 경우에 있어서는 동년배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
사도 바울이 ‘우르바노’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그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의 선교팀들이 모두 그에게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르바노를 “우리의 동역자 우르바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르바노는 그리스 반도에서부터 사도 바울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루바노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배운 사람을 보여집니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근거는 같은 구절에 함께 기록되어 있는 젊은이 ‘스다구’ 때문입니다.
‘우르바노’라는 하는 이름은 라틴식으로 개명된 것으로 보이지만 ‘스다구’는 헬라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스다구'(Stachys)’는 암블리아의 경우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다구가 청년이라는 의미입니다.
헬라식 이름인 ‘스다구’는 ‘이삭 또는 곡식의 알맹이’라는 좋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다구" 라는 이름은 귀족의 이름으로 아마도 황제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아닌가라고 생각됩니다.
스다구는 그의 이름에 어울리게 신앙심이 좋은 청년으로 보입니다.
박해당하던 시기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들고 자기들 모임에 나오라고 권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의혹의 시선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모임(교회)에 들어오려면 먼저 교인들을 친밀히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교회에 들어오라고 권유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 회심은 관계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볼 때 '스다구'는 우르바노'의 아들이거나 친족관계로 보여집니다.
1세기 로마 사회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노예들은 밤에 매트나 덮개를 덮고 복도나 집의 열린 공간에서 잠을 잤습니다.
낙태나 영아유기는 로마의 통상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노예 출신이었던 우루바노와 스다구가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우루바노에게는 '우리의 동역자 우루바노'라고 했습니다.
'스다구'에게는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라고 했습니다.
1세기 로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이 차등이 없었습니다.
자유인이나 노예도 차등이 없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도, 착한 자나 사악한 자도 차등이 없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모두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1세기 로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전해졌습니다.
빈부나 귀천, 남자나 여자, 그리고 인종간에 차별이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차별이 없이 믿음을 가지고 성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1세기 로마에서 그리스도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21세기의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그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안!
‘스다구'(Stachys)’에 대해서는 제임스 L. 파판드레아가 쓴 「로마에서 보낸 일주일」이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자인 제임스 L. 파판드레아는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초대교회 역사와 로마제국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로, 초대교회 역사에 저명한 학자입니다.
주후 50년 예루살렘 공의회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는 베드로를 기다리는 '길 따름이'(그리스도인)들의 일상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야기는 1장 '달의 날'(월요일)부터 7장 '태양의 날'(일요일)까지 일주일간 이어집니다.
1세기 로마에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제국을 배신"하고 "오랜 전통을 배신"(86쪽)하는 자가 되길 요구받는 것이었으며, 소속된 길드에서 쫓겨나고 생계 수단과 후견인을 잃는 등 그야말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51쪽)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저자는 주인공인 해방 노예 스다구와 '길 따르미들'이 현실적으로 마주하는 위기와 고민, 그들이 모임(성찬례)을 통해 서로를 격려해 나가는 방식을 보여 줌으로써, 오늘날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책은 스다구라는 노예에서 해방된 45세 가량의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자신의 주인이었던 후견인 우르바노와 함께 제국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출세와 성공을 위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우르바노가 근위대장을 살해함으로 죽음의 위기까지 가나, 결국 ‘길 따르는 자’의 삶을 깨달음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주인공인 스다구는 후견인인 우르바노와 예수를 따르는 아내 마리아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마리아를 따를 것인가? 성공을 위해 후견인인 우르바노와 함께 비열한 로마의 정치에 몸을 담을 것인가?
그는 그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남겨진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예수를 믿는 이들의 도움과 태도를 통해,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함께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피해를 당연하게 여기면서 스다구를 돕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후견인인 우르바노와 함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저자는 히스토리컬 픽션(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서신서와 사도행전의 행간을 사실적으로 복원합니다.
2천 년 전의 로마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능수능란하게 당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그려냅니다.
「로마에서 보내 일주일」 본문 중에서 몇 문장을 읽어 봅니다.
우르바노는 스다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네는 언제나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노예였어.
그리고 지난 십오 년 동안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피후견인이었지.
내게 굴욕을 안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네.
제기랄!
나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하는 이 얘기를 다른 후견인들 앞에서 꺼냈다가
내가 그 사람들 보는 데서 당황스러워할까 봐
자네가 철저히 욕을 보기로 한 거였구먼.
말해 주게, 스다구,
자네는 새로 시작한 신앙생활 때문에 기꺼이 욕을 당하기로 한 건데
그 때문에 내 눈에는 자네가 더 존경스러워 보이니 어찌 된 거지?”
스다구가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우르바노가 결론을 내렸다.
“좋아. 이제부터 나를 주인님이라고 안 불러도 좋네.
그리고 아침마다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오게, 다른 모든 피후견인들보다 먼저 말일세.”
- 달의 날 -
“맞습니다. 그 사람들 모임에 들어가면, 더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 목록이 줄줄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다구의 불평은 반은 건성이었다.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문제가 자신의 진짜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스다구 자신은 알고 있었다.
진짜 걱정스러운 것은,
세례받은 길 따름이가 되면 앞으로 사업 역량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문제였다.
- 화성의 날 -
스다구는 격앙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내게 무얼 요구하는지 모른단 말이오?
길 따름이들이 내게 뭘 기대하는지?
이건 너무 지나쳐! 당신은 내게 제국을 배신하는 자가 되길 요구하고 있어.
우리의 오랜 전통을 배신하라고 말이지.
티베르강의 흐름을 거슬러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리아는 스다구를 등지고 서서 흐느껴 울었다.
- 화성의 날 -
“극장에 간다고? 진심으로 그런 데는 안 갔으면 좋겠는데.
마가가 길 따름이들은 극장 같은 데 가지 않는다고 한 거 당신도 알잖소.
극장에 가면 그날 공연을 바쿠스 신에게 헌정하는 순서가 있어요,
그 헌정식이란 게 관객 앞에서 실제 성행위까지 하는 거란 말이오.
게다가 극장에서 하는 연극은 온통 타인의 불행을 웃음거리로 삼는 이야기뿐이오.
우리는 그런 짓 안 해요, 율리아.”
- 금성의 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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