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마당 벤치에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면회 온 ‘아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참새 한 마리가
아버지와 아들이 앉은 자리 앞에 와서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저 새 이름이 뭐냐?”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예, 아버지! ‘참새’잖아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떡이셨습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 아버지가 다시 물으십니다.
“얘야, 저 새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아들은 아버지를 한 번 쳐다보더니
“참새라고 그랬잖아요. 아버지, 참새요!”
아버지는 다시 고개를 끄떡이시더니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저 새 이름이 뭐라고?”
아들은 아버지 쪽을 향해 돌아앉으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이고, 아버지! 참새요, 참새.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알아들으세요, 참새요, 참새!”
아버지는 다시 고개를 몇 번 끄떡이시더니, 아무 말이 없다가 또 다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 아들아, 저 새 이름이 뭐라고?”
아들은 벌떡 일어나면서, 돌멩이를 걷어차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를 놀리세요?
제가 참새라고 몇 번을 얘기 해줘야 알아들으세요.
제가 참새라고 했잖아요. 참새! 아이씨.”
아들은 아버지를 병원 벤치에 혼자 버려두고 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지의 오랜 일기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나이 34세, 자기 나이 5살 때 어느 날 일기였습니다.
그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내 아들과 공원에 가서 놀았다.
조금 있으니까 우리가 노는 앞에 참새가 날아와서 앉아 놀고 있었다”
아들은 신기한 듯 나에게 물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예요?”
나는 대답했다.
“어, 우리 아들! 저 새 이름은 참새야요, 참새”
그러자 아들이 “아아”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아들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라고 그랬죠?”
그래서 나는 또 대답하기를
“아고, 울 아들, 저 새 이름은 참새라고 그랬죠.. 참새!”
그러자 ‘아...아’하고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다가 아들이 웃으면서 또 물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예요?”
그래서 나는 그 종알거리는 입술이 너무 귀여워 볼을 어루 만지면서
“이궁 우리 아들, 아빠가 참새라고 그랬죠? ‘참.....새....”
아들은 재미나다며, 막 웃으면서 금방 또 물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이 뭐라구요?”
그러기를 오전 내내, 수십 번, 수백 번을,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귀엽고 사랑스런 울 아들을 꼭 껴안으면서 “참.......새”라고 해 주었다.
오늘 하루는 울 아들과 너무 너무 재미있고, 행복한 하루였다.
아버지의 일기를 읽으면서 아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주룩 주룩 흘려 내렸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이렇게 키우셨건만, 나는 아버지의 인생에 가장 힘들어 하실 때,
아버지를 귀찮아하고, 신경질을 내고, 박대한 것이 너무나 죄송하고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박목월 시인의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회초리를 들긴 하셨지만
차마 종아리를 때리시진 못하고
노려보시는
당신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
와락 울며 어머니께 용서를 빌면
꼭 껴안으시던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너무나 힘찬 당신의 포옹
바른 길
곧게 걸어가리라
울며 뉘우치며 다짐했지만
또다시 당신을 울리게 하는
어머니 눈에
채찍보다 두려운 눈물
두 줄기 볼에 아롱지는
흔들리는 불빛
중국 진(秦)나라 때, 까마귀의 습성을 비유한 일화가 있습니다.
까마귀는 알에서 깨어나 부화한지 60일 동안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지만, 새끼가 다 자라면 그때부터는 먹이 사냥이 힘이 부치는 어미를 위해서, 자식이 힘을 다하여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합니다
진나라 왕이 덕망 있고 학식이 깊은 이일이라는 선비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일은 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공손히 거절했습니다.
왕은 이일에게 이유를 묻자 그는 “전하! 제게는 늙고 병든 할머니가 살아 계십니다. 나라의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늙은 할머니를 제가 모시지 않으면 아무도 돌 봐줄 사람이 없어 제가 모셔야 합니다. 부디 까마귀가 어미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과 같이, 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 까지 만이라도 봉양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진나라 왕은 이일의 효심에 감동하여 큰 상을 내렸습니다.
‘자식이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성’을 이르는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처럼 부모님의 은혜에 아름다운 헌신으로 보답하는 자녀의 효는 동서고금에 귀감이 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 출애굽기 20장12절 -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 에베소서 6장2절 -
‘공경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티마오’(τιμάω)로써 ‘높이 평가하다, 가치를 두다, 존경하다, 공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경하다’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공손히 받들어 모시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마땅히 공경해야 하며 그것은 이 땅에서 부모에게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단지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신약성경의 말씀 (마15:4,6 ; 19:19, 막7:10 ; 10:19, 눅18:20, 요5:23 : 8:49)이 인용된 구약성경을 보아야 하며 특히 부모와 공경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70인역에서 ‘티마오’(τιμάω)를 번역한 히브리어는 ‘카바드’(דבכ)이며 부정적 의미로 ‘무겁다, 괴롭다, 함들다, 짐스럽다, 누를 끼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긍정적 의미로는 ‘다수의, 부유한, 영화롭게 하다, 명예롭다, 영광스럽다’라는 서로 상반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적용해서 “부모를 공경하라”를 설명하면 ‘부모를 무겁게 대하라’는 뜻이 됩니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말과 행동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신명기 21장에는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자녀 세대를 치리하는 법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거든, 그 부모는 그 아들을 붙잡아, 그 성읍의 장로들이 있는 성문 위의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방탕한 데다가 술만 마십니다' 하고 호소하십시오. 그러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서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의 주검은 나무에 매달아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그 주검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로 밤을 지내지 말고, 그 날로 묻으십시오.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21장18-23절)
자녀 세대가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 것을 ‘완악, 패역’이라 말하고, 그러한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는 징계를 해야 하고, 징계를 했는데도 여전히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완악하고 패역한 자녀 세대를 돌로 쳐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그것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죄악을 제거한 선한 일이 됩니다.
요즘 시대의 사회적, 또는 법적 잣대로 재어보면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고, 자녀 세대가 처벌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녀 세대에게 해를 가한 부모 세대가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를 무겁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가벼워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존재의 무거움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존재가 가벼워야 합니다.
이것을 경제적인 용어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고 합니다.
노동의 유연성이란 인간이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어떠한 노동을 위해서라도 갈아 끼기 쉬운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사는 노동자를 마음껏 해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노동자도 회사를 마음대로 이직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이윤을 내기 위해서 회사는 노동자를 부리기 쉬운 상태(유연한 상태)로 만들려고 합니다.
최고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최상의 가벼운 상태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자본이 나를 선택하기 쉽게 존재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돈 많이 주고 나를 데려다 쓰세요."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모두 돈을 위해서 가벼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존재가 가벼운 사회에서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말할 수 없이 가벼워집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적 문제들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무겁게 대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 대해서 벌어지는 것들입니다.
부모를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패륜이 발생합니다.
이웃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사람을 해치고 악을 저지릅니다.
요즘에 일어나는 <묻지마 살인>은 이웃을 가볍게 대함으로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자식을 무겁게 대하지 않으니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남을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자식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인하여 인간관계는 깨집니다.
두터운 인생, 두터운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니 우리의 인생은 늘 외롭습니다.
존재의 가벼움으로 외톨이가 생깁니다.
관계가 깨지는 것만큼 인간에게 고통스러운 형벌이 있을까요?
현대인은 두 가지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나는 편집증이고 다른 하나는 우울증입니다.
편집증은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해서 발생하는 병이고, 우울증은 다른 이들과 유의미한, 두터운 관계를 맺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존재의 가벼움, 관계의 가벼움을 벗어나 존재의 무거움, 관계의 두터움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조금 무겁게 세워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쉽게 팔아버리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켜 나가는 존재, 인간관계에서 이익만 취하는 가벼운 관계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유의미한 의미를 창조해내는 관계, 즉 두터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나를 두텁게 하면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웃과의 관계를 무겁게하면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집니다.
그렇게 될 때 나를 귀중하게 여기고 이웃을 또한 소중하게 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장37∼40절 -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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