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개 잡는 날 다들 모두 구경 오세요!

가족사랑 2022. 10. 14. 15:05

여의도 개사육장


                                                                                                                                                                                                                             ㅡ 김동길 ㅡ

한강 옆 여의도의 쓸모없는 모서리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개사육장 (국회의사당)이 하나 있다. 

썩을 대로 썩고 악취 나는 똥개들 사육장엔 

수캐가 251마리 암캐가 49마리 도합 300마리인데, 

진돗개는 너댓마리고 대다수가 광견병에 걸려 

보신탕집 개장수한테 팔고 싶어도 사간다는 데가 없다.
인애하신 주인께선 맛있는 사료와 최적의 사육환경을 제공해주셨건만

그 은혜를 망각하고 주인을 할퀴고 물고 주인을 공격한다.
사료도 최고급품으로 한 마리당 월 2000만원 사료 값이 만만치 않다.

거기다가 7~8마리의 새끼 개까지 데리고 다니니 완전 개판 세상이다.
똥개 주제에 인력거도 최고급, 해외여행도 년 2회씩, 공짜로 시켜달란다.

우리 같은 수천만 주인들이 똥개 사육하기에 허리가 휜다.
그중에 제일 늙은 개 8살짜리 한 마리, 7살짜리 한 마리, 6살짜리 대여섯 마리

그 나머진 제 나이도, 제 이름도 모르는 지능지수 낮은 똥개들이 밤낮 없이 짖어대니

이거 원 시끄러워 단잠을 못자겠다.
언제 날 잡아 개귀신 불러다가 똥개들 아가리에

고압전류 먹게 해서 도살을 해야 할 텐데,

썩고 악취심한 개고기는 아무도 안 드시겠다니 이걸 어쩌나?
모두 한강물에 수장할까?

그럼 수질오염으로 바닷고기도 죽을 텐데 ……

개 잡는 날 다들 모두 구경 오세요.

ㅡ 개주인 ㅡ

- 김동길(1928 - 2022) -

 

<개 사육장>은 九旬의 노학자 김동길박사의 유쾌한 풍자의 글입니다.

김동길(94) 연세대 명예교수가  10월 4일 오후 10시 50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기 질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지만 “결혼하지 않았을 뿐 늘 사랑하고 살았고, 여성을 떠나본 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10월 2일 생일을 맞아 이철 세브란스병원장에게 서신을 보내 “내가 죽으면 장례식과 추모식을 생략하고 시신은 연세대 의료원에 기증해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길 바란다.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김동길 교수는 1928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면장이었던 부친 김병두씨는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돌보며 그와 그의 누나(김옥길 전 문교부 장관) 등 4남매를 공부시켰다고 합니다.

김교수는 광복 직전 잠시 국민학교 교사 생활을 했지만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 1946년 월남한 후 2022년 영면에 들기까지 94년을 독신으로 보내면서 공직으로는 연세대학교수와 부총장 그리고 국회의원을 역임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동길 교수의 직업에 대하여 위키백과는 ‘영문학자·대학 교수·언론기업가·정치가·시민사회운동가·정치학자·정치평론가·시사평론가·저술가·작가·시인·수필가·문학평론가·철학자·역사가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국가원로였습니다.

김동길 교수는 연희대(현 연세대) 영문학과를 다녔고, 미국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주 에반스빌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했습니다.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주제는 링컨이었는데 “링컨은 정직한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귀국 후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내며 잡지 ‘씨알의 소리’ 등에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유신 정권 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돼 ‘학생운동권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이때  해직된 뒤 1979년 10·26 때 일시 복직했다가 1980년 신군부의 탄압으로 다시 해직됐으며, 1984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김교수는 훗날 박정희를 회고하며 “유신체제가 잘못된 것이 많지만 조국의 경제를 이만큼 만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직 기간 중 에세이, 신문 칼럼 집필과 강연으로 대중과 친숙해지며 ‘스타 학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콧수염과 늘 매고 다니던 나비 넥타이는 트레이드 마크처럼 떠올랐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면으로 일갈하는 “이게 뭡니까?”라는 그의 말이 유행어가 됐습니다.

김교수는 수많은 강연과 기고, 방송, 유튜브 등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설파했고 숱한 독자와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김교수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 외에 14대 국회의원, 신민당 공동대표, 조선일보 논설고문 등을 지냈습니다.

2017~2018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이 만년의 대표적 저술이었습니다. 

 

세  월  

 

 김동길 교수

 
내 멋진 친구들에게..!
친구야!
인생 별거 없더라...
이리 생각하면 이렇고
저래 생각하면 저렇고
내 생각이 맞는지 네 생각이 맞는지
정답은 없더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가 잘라 뭐하고 네가 잘라 뭐하나
어차피 한 세상 살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건데
이 세상 누구도 영원한 삶은 없다네.
 
화낸 들 뭐하고 싸운 들 무엇하나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뼈에 박히고 가시가 있는 말들도...
우린 씹어 삼킬 나이와 가슴이 있잖아...
 
때로는 져주고 때로는 넘어가 주고
때로는 모른 척 해주자
그게 우리 아닌가 어차피 우린 친군데
 
그게 무슨 소용 있겠나
이왕 살다 가는 세상 그 무엇이라고~
안 되는 거 없고 못할 것도 없다.
 
여보게 친구 어느덧 우리 인생도
이제 가을이 되었네그려...
꽃피는 봄 꽃다운 청춘
 
그 좋았던 젊은 날들
이제 석양에 기울었지만
고운 단풍이 봄꽃보다 낫다네.

돌아보면 험난했던 세월
자네는 어떻게 걸어왔는가?
 
모진 세파에 밀려 육신은
여기저기 고장 나고
 
주변의 벗들도 하나둘씩 단풍이 들어
낙엽처럼 떨어져 갈
가을 인생의 문덕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힘든 세월
잘 견디고 무거운 발길 이끌며
여기까지 잘 살아왔으니
 
이제는 얽매인 삶 다 풀어놓고
잃어버렸던 내 인생 다시 찾아
숙제 같은 인생 축제처럼 살자.
 
남은 세월 이제 후해 없이 살아가세나.
인생 나이 60~70 이 넘으면
남과 여, 이성의 벽은 무너지고
가는 시간 가는 순서 다 없어지니
 
부담 없는 좋은 친구들 만나 말동무하며
산에도 가고 바다도 가고 마음껏 즐기다
언젠가 나를 부르면
자연으로 흔쾌히 돌아 가세나...

 

 

독일의 문호 괴테는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이란 해가 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의 눈으로부터 벗어나 볼 수 없게 되더라도 태양은 지평선을 향해 조금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우리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계속 존재한다. 내세에 대한 희망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죽어 있는 셈이다.'

 

생사학(生死學) 전문학자인 오진탁 한림대 철학과 교수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삶 자체와 함께 진행되는 거죠. 이처럼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아요. 성장의 마지막 계기인 죽음을 수용하지 않거나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뿐 아니라 삶에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종교적 수행을 하는 이유 또한 죽음 준비, 즉 삶의 준비에 있지요.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담담하게 평온한 마음으로 죽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성취입니다."

 

품위 있는 생의 마감, 아름다운 마무리를 잘 표현한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가장 분명한 사건은 태어난다는 것과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가장 확실한 사건이지만, 그 때는 가장 불확실한 순간입니다.

죽음이란 생명에 있어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사건이지만, 또한 죽을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에게만 가능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생명이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며, 삶이란 죽음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해야할 것입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태어나는 것이 삶이듯 죽음도 삶입니다. 드는 발도 걸음이고 내딛는 발도 걸음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일상의 삶에서 잊히고 감추어져 있으며, 멀리 밀쳐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 존재에게는 가장 분명한 사건이며, 우리를 에워싸고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합니다.

다가올 사건인 죽음에 대한 생각이 현재의 삶을 방향 짓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이중적이며, 서로에 의해 서로가 결정되는 상호 관계에 놓인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존재의 필연적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 삶의 의미란 애초에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창세기 2장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아내 하와와 함께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이라는 말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최초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의 정확한 의미>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刑罰)을 내리셨는가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신 불순종의 죄에 대한 대가(代價)는 성경에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23절)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동산(겔28:13)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시며 교제하시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생명(生命) 그 자체이십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부터 쫒겨났다는 것은 생명으로부터 분리(分離)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신학적으로 영적(靈的)죽음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불러 놓고 각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내리시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장1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생명으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영은 즉시 죽었지만, 그들의 육체는 자체 생명력으로 몇 백년을 더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끊임없이 그 속에 작용하여 그들의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되어 육체가 흙으로 돌아 갈 때까지 계속 역사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기 3장16절)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는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고”(창세기 3장17절),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것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창세기 3장19절)고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여자가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고, 남자가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다가 결국 기(氣)가 진하여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은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의 결과입니다.

이로써 로서, 죄인들의 죽음은 결코 삶의 자연스런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없다. 영과 육이 분리되어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현상을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라 부른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영생(永生)할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세기 3장22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의 길에 접근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으시되,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쫒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세기 3장24절)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고 죄인들이 영생할 수 없도록 막으신 것은 죄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사랑의 배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고, 생명이 거하시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서 영생할 수 없게 된 상태는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너무나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에게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소멸(消滅)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들에게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 심판이 따라오고 하나님과 분리된 채 영원히 어둠 속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원한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들이 죽어가는 과정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 받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3장16절 -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겨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대신 치르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자는 영생(永生)을 얻게 되고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15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생명책에는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선한 행위를 많이 한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어있을까요?

아닙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장 8∼9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