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성탄절/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가족사랑 2022. 12. 21. 07:45

2022.12.25.

성탄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마태복음 1장 18∼25절 □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성탄(聖誕) 사건은 한 개인이나 민족을 넘어 전 인류와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친 크고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기쁘고 좋은 소식을 안겨준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짜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태어난 해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 의해서 12월 25일로 정해진 성탄절은 기원후 4세기경부터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축제가 된 것은 중세 중반부터였습니다.

그 후 성탄절은 전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하였습니다.

성탄절(크리스마스,Christmas)이 세계적 축제로 자리하기는 했지만, 진정 성탄절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아기 예수의 나심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리를 위해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자 예수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오색빛깔 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는 한국 사회에서 성탄절은 교회 안팎으로 세속화되고 상품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기의 성탄절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덕을 찬송하는 ‘예배의 자리’였습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성탄 시즌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상징적인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구세군의 상징이 된 ‘자선냄비’(Christmas Kettle)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빈민구제와 봉사를 위해서 시행하던 자선냄비를 1928년 성탄 시즌에 한국구세군 사령관 박준섭(Josehp Barr, 1870-1942) 정령이 불우한 자들을 위한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거리에서 시작한 것이 효시가 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성탄 시즌에 병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상징적인 전통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크리스마스실’(Christmas seal)입니다.

황해도 해주에 구세요양원을 설립한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 선교사가 세계 각국에서 결핵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매되던 크리스마스실을 1932년부터 발행하여 국내 결핵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는 한센병, 화류병, 결핵 등 3대 질병이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던 초기에 한 결핵환자는 크리스마스실을 결핵 치료제로 여겨 매일 밤마다 가슴에 붙였지만, 기침조차 낫지 않는다고 하며 크리스마스실 값을 돌려달라고 셔우드 홀에게 편지를 했다는 웃지 못할 촌극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결핵 박멸 운동이라는 거대한 차원에서 도입된 크리스마스실은 1940년까지 9번 발행되었다가 셔우드 홀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되면서 중단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의사 문창모에 의해 재발행되기 시작하여 6・25전쟁 당시 또다시 잠시 중단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같은 ‘자선냄비’나 ‘크리스마스실’이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한국교회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으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이웃 사랑은 한국교회가 성탄절을 지키기 시작하던 초창기부터 실천하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가 성탄절을 지키면서 초창기부터 실천해온 따뜻한 이웃 사랑은 일반 신문에서도 추운 겨울을 녹이는 훈풍 기사로 종종 소개되었는데, 1925년 1월 4일 자 「동아일보」는 평양 지역에 있었던 평양중앙감리교회와 이문리감리교회(훗날 채관리교회)의 빈민 구제에 대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평양 이향리 평양중앙교회당에서는 작년 구주 성탄축하 당시에 빈민구제를 하기 위하여 일반교인들에게 구제금품을 다수히 모집하여 놓은 후 그때부터 동교회당 직원 수삼인이 창광산 아래의 빈민부락을 위시하여 교외에 산재한 적빈자들을 일일이 호별로 조사하여 약 이백사십호에 구제 시여권 일매씩을 각기 배급한 후 수일 전에 그 빈민을 전부 동교회내에 초청하여 이백사십호 이백사십명에게 각기 소미일두씩을 시여하였다는데 기근에 신음하던 일반 빈민들이 그 소미일두씩을 받아들고 너무 감격에 넘치어 모두 고마운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하며 또한 이문리 감리교회에서도 극빈자 약 백호에 그 같은 방식으로 구제의 금품을 다수히 시여하여 피 구제자들은 매우 감사한다더라

 

- 남산현 감리교회는 1893년 평양 대찰리 출처 :  가스펠투데이(http://www.gospeltoday.co.kr) -

 

1.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목을 끄는 구절은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 7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BC 8세기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적인 상황은 강대국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북에는 잔인하고 강대한 앗수르 제국과 수리아 제국이 호시탐탐 이스라엘과 유다를 삼키려하고 있었고, 남에서는 애굽 제국이 또한 기회만 있으면 가나안 지역을 자기 세력에 넣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으로 비유한다면 중국과 북한이 연합하여 서울까지 쳐들어 온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에 유다의 아하스 왕은 극심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아하스 왕에게 보내서 한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 난국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한다고 했습니다.

그 징조(sign)로서 “임마누엘(עִמָּנוּ אֵל, Ἐμμανουήλ)”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름은 유다가 연약하고, 아하스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을 보여주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만 아니라 에스겔에게도 희망의 말씀을 징조로 주셨습니다.

에스겔 33장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이미 나라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성전을 환상 가운데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냥 막연한 조감도 정도만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중 마지막으로 그 성전이 있는 땅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에스겔 마지막 장, 48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역을 보여주시면서 그 땅을 모두 12지파별로 분배를 해 주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셨던 것처럼, 나라가 멸망당한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환상 중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한 번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십니다.

땅을 분배해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란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땅의 중심부에 한 성읍이 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성읍은 다름아닌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성읍의 이름을 ‘예루살렘’이라고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 삼마(יְהוָה שָׁמָּה’)입니다.

에스겔 마지막말씀, 48장 35절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인데, “여호와 삼마”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멸망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폐허가운데 있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늘 함께 동행해주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북한땅에는 수십 군데(38군데) 수용소에서 신음하는 형제들(100만명)이 있습니다. 잔인한 공개 처형의 공포 속에서도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믿음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공개처형의 현장에서 함께 계시는 “여호와 삼마”,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나라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성읍을 건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머무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결코 떠나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성읍을 건축하시고 거기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그래서 그 성읍을 ‘여호와 삼마’라고 이름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그 폐허 가운데에 계십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 삼마’ ‘임마누엘’입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을 때에만 거기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계셨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하고 성전이 파괴된 지금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하나님께 거기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도 임마누엘이며, 여호와 삼마입니다.

지난 날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들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놔버릴 때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꼭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은헤로운 가사를 지니고 있는 <우리 주 하나님 큰 영광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1. 우리 주 하나님

큰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큰 권능과 능력으로 주의 말씀 이루시리

 

거룩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하나님 나라 임하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이제 곧 오실 우리 왕

 

2. 주 임재 하실 때, 모든 만물 경배하리

어둠 권세 물러가네, 오셔서 다스리소서

 

거룩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하나님 나라 임하네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이제 곧 오실 우리 왕

 

2.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요한복음 1장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장14절 -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죄에 빠져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3장16절 말씀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읽은 3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자이십니다.

“예수”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여호수아나 호세아도 같은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구원자는 적들과의 전쟁에서 구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와 죽음에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영적인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마태복음 26장28절 -

 

우리 사회는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롭습니다.

각 사업장들에서 임금을 올려달라고 데모를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조선시대 정승보다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도 먹고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자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절규합니다.

절대 빈곤국가인 방글라데시나 네팔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높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경제문제나 열악한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죄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하더라도 죄 때문에 만족과 평안이 없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남을 무시하면서 제 고집대로 살아갑니다.

음란하고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 때문에 행복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나서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죄 때문에 내면이 짐승처럼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납고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음란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이익 때문에 때리고 죽입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물질로 부모형제도 없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사형수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며 고깃국을 먹는다고 행복하겠습니까?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늘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죄와 죽음권세에 사로잡혀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죄인들과 함께 하시면서 죄로 병든 내면을 치료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피와 물을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구주(the Savior)로 영접하면 죄에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믿음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본래의 의미를 살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임마누엘 하나님”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날 밤 꿈을 꾸었네

주와 함께 바닷가 거니는 꿈을 꾸었네

하늘을 가로질러 빛이 임한 그 바닷가

모래위에 두 짝의 발자국을 보았네

한짝은 내것, 또 한짝은 주님의 것
 

거기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보았네

마지막 내 발자국이 멈춘 곳에서

내 삶의 길을 돌이켜 보았을때

자주 내 삶의 길에

오직 한 짝의 발자국만 보았네

그때는 내 인생이 비참하고 슬픈 계절이었네
나는 의아해서 주님께 물었네

주님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했을때

당신은 저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때

그때 거기에는 한 짝의 발자국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떠나 계셨지요?
 

주님께서 대답하시었네

나의 귀하고 소중한 이여

나는 너를 사랑했고

너를 결코 떠나 있지 않았단다

네 시련의 때, 고통의 때에도

네가 본 오직 한 짝의 발자국

그것은 내 발자국이니라

그때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의 기쁨과 감격은 날마다 어떤 환경에서든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이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 함께함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을 부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그 현장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임을 기억하십시오. 평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