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미안하오. 이제 깊이 뉘우쳤소. 앞으로 달라지겠소!"

가족사랑 2022. 8. 16. 17:58

일제 식민지 때,

경북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던 퇴계의 제자이자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의성 김씨 학봉파의 명문가 후손으로,

학봉 '김성일'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金龍煥, 1887년~1946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 파락호 김용환(金龍煥, 1887~1946) -


김용환은 노름을 즐겼습니다.

당시 경북 안동 일대의 노름판을 찾아다니며 끼었고 초저녁 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다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습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게 되지 않아 실패하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치는 수법을 사용했습니다.

김용환은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이었습니다.
김용환은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른 채, 수 백 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 약 400억 원)을 다 팔아먹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이제 깊이 뉘우쳤소. 앞으로 달라지겠소..."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다시 땅 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을 망해 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당시 양반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김용환을 파락호(破落戶)라며 수군거렸습니다.

※파락호(破落戶), 깨트릴 파, 떨어질 락, 집 호)라는 말은 양반 집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

행세하는 집 자손으로 난봉이 나서 결딴났다는 것입니다.

김용환은 당시 사방 십 리를 가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만큼 재산이 넉넉했습니다.

외동딸은 파락호 아버지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했습니다.

어딜 가나 들리는 건 아버지 얘기였습니다.

김용환의 외동딸이 겨우 혼처가 정해졌는데 혼수가 문제였습니다.

사정을 듣고 시집에서 장롱 살 돈을 보냈는데 그것마저 김용환을 노름판에 들고가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 손으로 시댁에 갈 수 없어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농을 가지고 울며 시댁으로 갔습니다.

헌 장롱을 가져가고 3년 동안 태기가 없자 시집에선 귀신이 붙었다며 장롱에 불을 질러 태웠다고 합니다.

이 정도이니 주위에서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천하의 파락호이자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 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 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내졌던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노름 판돈은 그냥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며칠 뒤 독립군 자금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노름판은 한량이나 노름꾼의 돈을 따서 모으고 자산가들이 거금을 날렸다는 소문을 돌게 해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역할을 했습니다.

김용환은 일경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이렇게 노름꾼 행세를 한 것입니다.

 

1920년 의용단(義勇團)이 조직됩니다.

김용환은 서기 직책을 맡아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나섭니다.

항일운동이 독립군의 자금 모금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연구한 김희곤 안동대 교수는 “김용환 등은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기지를 지원했다”고 정리했습니다.

1922년 12월 김용환은 독립운동자금 37만원 모금 활동 중 신태식·이응수 등과 함께 체포돼 의용단원 36명이 대구감옥에 수감됩니다.

그의 네 번째 구속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매일신보> 등에 보도됐습니다.

당시 일경이 작성한 ‘고등경찰요사’에도 ‘김용환(36세) 등이 자산가에 돈을 내도록 협박했다’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 나옵니다.

김 지사는 이후 ‘요시찰 인물’이 됩니다.

그 무렵 김용환의 기행(奇行)이 이어집니다.

그는 학봉종택에 내려오던 전답과 임천서원에 딸린 땅 등 43만㎡(13만 평)를 처분합니다.

요즘 화폐 가치로 보면 대략 300억원 어치입니다.

또 300년을 내려온 학봉종택을 세 차례나 팔았습니다.

종손이 종택을 팔면 문중은 위신 때문에 돈을 내고 되찾습니다.

김용환이 모두 노름판에 날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당시 지방에는 작은 박람회 같은 별시(別市)가 열흘 정도씩 열렸습니다.

그러면 전국의 한량과 노름꾼이 모여들어 여기저기 판이 벌어집니다.

행사 마지막 날 새벽에는 큰 판이 섭니다.

각 노름판에서 돈을 딴 이들이 모여 딴 돈 전부를 거는 싹쓸이 판입니다.

여기에 김용환과 동지들이 나타납니다.

이 판에서 김용환은 언제나 돈을 땄습니다.

여기서 “내가 이겼다”고 우기는 말을 듣지 않고 패를 확인하려 들면 그때 김용환은 “첫닭 운 뒤 갑오(9)는 따라지 만도 못하다”며 판돈을 몽땅 끌어 모아 동지에게 줘버립니다.

만약 이때 버티는 노름꾼이 있으면 김 지사가 “새벽 몽둥이야!” 소리치면 수행하던 10여 명이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두르며 판돈 전부를 강제로 빼앗아 자루에 넣은 뒤 사라졌습니다.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자료

이 돈이 전부 독립군들의 군자금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노름꾼, "망나니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위장한 삶을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습니다.

1946년 여름 김용환은 병세가 위중해졌습니다.

독립군 동지인 하중환(河中煥) 지사가 문병을 하면서 “여현(汝見, 지사의 字)! 정말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눈을 감으실 건가. 이제 그동안의 독립운동 내용을 아들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습니다.

기진맥진하던 김용환이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안 되네! 내가 지금 지난 일을 말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 걸세. 새삼 그럴 필요 없네. 이제는 독립도 됐고… 내가 좋아서 한 일이고… 선비의 후손으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 말하지 말게… 끝까지 비밀로….”

김용환은 입을 다물었고 이틀 뒤 운명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유언이 되었습니다.

하중환 지사는 김용환(지사)가 자신의 활동을 함구한 뒤 세상을 떠나자 1948년 7월 3년상을 마치는 날 제문에 그 내용을 적었습니다. 김용환(지사)의 독립운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까닭과 군자금 모금 등을 남긴 것입니다.

김용환(지사)는 평생 노름꾼 '파락호'라며 가족과 문중, 뭇 사람의 오해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도 마지막까지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일제시대 때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왜경에게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항일의 뜻을 깊이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철저하게 망나니 행세를 하면서 노름판을 전전하는 "노름꾼 파락호"로 위장했던 것입니다.

1995년 광복절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아버지와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동딸인 '김후옹' 여사는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습니다.

평생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던 외동 딸, 김후옹' 여사는 아버지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우리 아배 ,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중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을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고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 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를 기다리며 신행 날을 늦추다가

큰 어매가 쓰던 헌 농을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이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 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의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 뿐인 외동 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가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는 아닐진데...


나라가 과연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가는 조국을 떠나보면 압니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대한민국의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용환'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파락호 애국자"이셨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로마서 9장 3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