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차 대전 중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 사건인 '홀로코스트'가 자행됩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폭력성, 타인에 대한 배타성, 죄 없는 민간인을 맘대로 휘어잡는 권위성 등 인간의 모든 악행이란 악행은, 이때 터져나오듯 표출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주동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약 1,100만명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들을 유독가스, 총살, 강제 노동, 계획적 영양실조, 인체 실험 등의 방법으로 잔인하게 학살하였습니다.
그 희생자 중에는 엘리 위젤의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 -
엘리 위젤(Elie Wiesel) 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작가, 교수, 인권 활동가, 홀로코스 생존자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입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에서도 주민들의 유대가 돈독한 시게트 유대인공동체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3월, 헝가리를 점령한 독일의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하여 가족들과 함께 게토로 이주했다가 다시 그해 5월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습니다.
이때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 중 90%가 사망했으며,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세 명도 살해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가 부헨발트 수용소로 옮겨져 가스실에서 죽게 될 운명이었으나,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부헨발트 수용소가 해방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해방 직전에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그의 왼팔에는 수감자 번호 A-7713이 문신으로 새겨졌습니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고아원으로 보내진 뒤 1948년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문학, 철학, 심리학을 공부했습니다.
전쟁 후 10여 년간 홀로코스트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으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설득으로 1958년에 회고록 《밤La Nuit》을 프랑스에서 출간했습니다.
《밤La Nuit》은 1960년 미국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된 후 10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전 세계 30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196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1976년부터 보스턴 대학교 인문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세계 각지의 폭력과 억압, 인종 차별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내 메리언과 함께 ‘인류를 위한 엘리 위젤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후로도 남아프리카, 니카라과, 코소보, 수단 등지에서 벌어진 폭력과 집단 학살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등 ‘강력한 인권 옹호자’로서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또한 미국 홀로코스트 추모 기념관 설립을 주도하고, 뉴욕 인권 재단의 창립 이사로 일하면서 전 세계 인권 증진을 위해 정치 지도자들과 교류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그를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유대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평소에도 “나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곤 했던 그는 학생들과 대화하고 가르치는 일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2011년에 은퇴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보스턴 대학교에서 교편을 놓지 않았습니다.
보스턴 대학은 그를 기리기 위해 ‘엘리 위젤 유대인 연구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2016년 7월 2일,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87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엘리 위젤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용소에서 보낸 그 첫날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밤은 내 인생을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된 길고 긴 밤으로 이끌었다. 나는 조용하고 푸른 하늘 저편, 동그란 연기가 되어 사라져간 아이들의 작은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 믿음을 영원히 불태워버린 그 불꽃을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게서 삶의 의지를 영원히 빼앗아 가버린 그 밤의 침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하느님만큼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운명이 되더라도, 나는 결코 이 모든 것을 잊을 수 없다.”
엘리 위젤은 강연을 통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으며 인간성을 구원하거나 적어도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다는 믿음에 미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비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일입니다만, 나는 그런 광기라면 언제든지 찬성입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세상에 선한 의지가 온전히 가득찰 수 있다면, '신비주의적' 광기에 빠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당신은 왜 세상의 온갖 불행에 맞서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의 목소리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도움,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필요한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나는 소수자들을 생각합니다. 사회의 소수자, 인종의 소수자, 종교의 소수자, 건강의 소수자, 그리고 에이즈 환자와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지금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삶의 불행을 덜어주지 않을 권리가 없습니다."
- 사회적 약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이 잊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인권을 유린당하는 사람들, 수감자들에게는 자신이 잊혀진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가장 좋지 않습니다. 박해자들은 수감자들의 용기를 꺾기 위해서 아무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잊는 것은,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하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회의 기득권층이 그들의 가난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여주기는 하지만,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나는 뒤처진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느낍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생명 지향적입니다. 우리는 강하고 젊은 것을 찬미합니다. 텔레비전 광고에 예쁜 여자들, 건강한 젊은 남자들만 나오는 것만 봐도, 젊지 않은 사람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 관해 글을 씁니다. 나는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 사람들은 어째서 잔인해집니까? 증오에 대해 말해 주십시요.
"우리는 결론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증오를 품은 사람은, 어느 한 그룹을 미워하는 것은 모든 그룹을 미워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증오는 암과 마찬가지로 전염성이 강합니다. 증오는 어느 한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어느 한 뿌리에서 다른 뿌리로, 어느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어느 한 그룹에서 다른 그룹으로 퍼져나갑니다. 증오를 품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 곧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는 데서는 기쁨이 없습니다."
- 듣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런 가르침을 되풀이 할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변하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의로운 남자 하나가 인류를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죄악에 가장 깊이 물든 도시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 도시를 소돔이라고 합시다. 남자는 갖은 궁리를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습니다. 남자는 한 남자와 여자가 있는 곳으로 와서 “잊지 마라, 살인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남자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습니다. 남자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주 두 주가 지났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가 흐른 뒤, 한 아이가 그 남자를 만류하면서 “도대체 뭐하시는 거예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잖아요. 왜 계속 외치고 있는 거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남자는 대답했습니다. “왜 그런 지 알려주지. 나는 사람들이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그런데도 점점 큰소리로 외치는 건 사람들이 나를 바꾸어놓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용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용기는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내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망명자입니다. 나는 경찰을 무서워합니다. 우연히 경찰을 보게 되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달아납니다. 나는 제복 입은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장군들을 봐도 겁이 납니다. 이런 점에서 지지자도 보호해 주는 사람도 한 명 없었던 예언자들은 정말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보살피는 아주 강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가요?
"예언자는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만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하나님을 통해서 말을 했습니다. 용기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권력이든 왕의 권력이든, 모든 권력은 개인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권력은 용기 있는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용기를 찾느냐입니다. 내 평생의 바람은 나의 과거가 아이들의 미래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젤은 그의 자전적 소설 <흑야(Night, 1958)>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갇혀 살면서 겪어야만 했던, 악몽과도 같은 고통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위젤은 죄 없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우주만물의 영원한 주인이며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왜 이러한 참상 속에서 그저 침묵만을 지키고 있는지를 매우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러한 신에게 아직도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도 심각한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조롱 섞인 기도를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선택하시어 밤낮 고문을 당하게 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제들이 화장장에서 최후를 마치는 것을 보게 하신, 우주의 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제단 위에서 학살되게 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합시다.”(<흑야>, 허종렬 옮김, 가톨릭출판사, 1988, 83쪽)
특히, 한 어린 소년이 어른 두 명과 함께 사형집행을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충격적인 기억을 절절히 고백합니다.
두 어른은 교수대에서 금방 숨이 끊어졌지만, 어린 소년은 몸무게가 얼마 안 되어 가벼웠던 탓인지 반시간 이상이나 목에 밧줄이 감긴 그대로 매달린 채 버둥거리다가 서서히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어린 소년을 바라볼 때, 이를 강제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여러 사람들 중 어느 누군가가 혼잣말로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엘리 위젤은 바로 그때 자신의 내부로부터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분이 어디 있느냐고? 그분은 여기 있어. 여기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어...”(81쪽)
위젤은 노벨평화상을 받은 후 기자가 "노벨 평화상 수상이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요?"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죽어가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저 단 한 생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지금까지 받은 모든 상과 명예 같은 건 다 내놓을 수 있습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위젤의 사망 뒤 발표한 성명에서 “위젤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도덕적 목소리이자, 세계의 양심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철조망과 감시탑 사이를 함께 걸으며 그가 내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기억은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가 되었다.'
어느 날 한 흑인 청소부가 미국의 거리를 빗자루로 쓸고 있으면서 오만 욕설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던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킹 목사는 젊은 청소부에게 다가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젊은 형제! 길거리나 쓸 일이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하고 무슨 불만이 그리 많아서 그렇게 욕지거리를 하고 있소!”
“아니 우리는 인간이 아니오? 왜 우리는 백인들이 어지러 놓은 거리나 쓸어야 하고, 백인들이 사용한 사무실, 그들이 더럽혀 놓은 화장실이나 청소해야 합니까? 제기랄, 더러워서 못해 먹겠소.”
그 때 킹 목사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꾸해 주었습니다.
“형제여! 당신은 지금 백인들이 어지러 놓은 길거리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목적이 있는 사람과 목적이 없는 사람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열심히 노력하여, 아름다운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불확실한 사람은 갈등과 방황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분명한 삶의 목적이 없는 사람은, 내일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죄악에 빠지고, 유혹에 넘어가고, 시험에 들어, 절망과 낙심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내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죄악을 멀리 하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고, 늘 소망 가운데,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삶의 목적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선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빌립보서 3장13∼14절 -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은 골인지점을향해 전력 질주합니다.
표적을 정해 놓은 사냥꾼은 그 표적을 향해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것은 달리기 선수가 골인 점을 향해서 한 눈 팔지 않고 전력 질주하는 것처럼 목표를 정해 놓고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것은 사냥꾼이 표적을 정해 놓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모두가 목적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젊은 시절 인생의 꿈을 다 접고 나이 80에 평범하게 양을 치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니다.
그는 호렙 산에서 여호와를 만난 뒤에 변했습니다.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하루 고기 잡으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목표랄 것이 따로 없는 “그럭저럭”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그의 삶이 변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세우게 됐습니다.
그는 그 목표를 향해서 전력 질주하였습니다.
한나는 처음에는 ‘주여, 저에게도 아들 하나만 주세요. 그저 아들 없는 서러움만 해결해주세요. 저도 아들을 낳은 여자라는 한풀이를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나는 깊은 기도 속에서 영적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목적 지향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 - 사무엘상 1장11절 -
“하니님, 저 같은 여자에게도 아들을 주시기만 하면, 그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잘 키워 바치겠습니다.”
"어두운 역사 속에서 민족과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기꺼이 들어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간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목적에 복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당신의 길을 가겠습니다. 나는 자신의 이윤을 이끄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겠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소원과 비전을 이루어주십니다.
닫힌 문을 열어주십니다.
적자인생이 흑자인생으로 바뀝니다.
쓴물인생이 단물인생이 됩니다.
썰물 인생이 밀물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목적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십시오!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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