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숙종(肅宗) 때의 일입니다.
아직 나이가 스물이 되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청년(靑年)이
경상도(慶尙道) 밀양(密陽) 땅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高裕(고유)” 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적(倭敵)을 물리친 “고경명(高敬命)”의 현손(玄孫)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父母)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친족(親族)들의 도움도 받지 못해 외롭게 떠돌고 있는 처지(處地)였습니다.
밀양(密陽) 땅에 이르러서는 생계(生計)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습니다.
비록 머슴살이를 살고 있고, 학문(學問)이 짧아서 무식(無識)했으나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였고, 언변(言辯)에 신중(愼重)하였습니다.
인격(人格)이 고매(高邁)하여 '고유'를 대하는 사람마다 그를 존중(尊重)하여 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고도령(高道令)"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박 좌수(朴座首)”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박 좌수(朴座首)”는
관청(官廳)을 돕는 아전(衙前)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러나 박봉(薄俸)이었고 중년(中年)의 나이 상처(喪妻)를 한 후(後)에
가세(家勢)가 매우 구차(苟且)하였습니다.
'박좌수'에게는 효성(孝誠)스러운 딸 하나가 정성(精誠)껏 아버님을 모시고 있어서
박좌수는 가난한 가운데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고유(高裕)”는
그 마을에서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내는 가운데
그 처녀(處女)의 효성(孝誠)과 현숙(賢淑)한 소문(所聞)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유는 먼빛으로 보고 그 처녀(處女)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처녀(處女)에게 연모(戀慕)의 정(情)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 처지(處地)가 이러하거늘 그 처녀(處女)가 나를 생각해 줄까?
그 처녀(處女)와 일생(一生)을 더불어 산다면 참 행복(幸福)할 텐데!
벌써 많은 혼사(婚事)가 오간다고 하는데, 한 번 뜻이나 전해보자. 그래, 부딪혀 보자고!”
그러던 어느 노을이 곱게 밀려드는 날,
“고유(高裕)”는 하루의 일을 마치고 “박 좌수(朴座首)”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본래 “박 좌수(朴座首)”는 장기(將棋)를 좋아하였으므로
장기판(將棋板) 부터 벌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실없는 말처럼
그러나 젊은 가슴을 진정(鎭靜)시키며 품었던 말을 꺼냈습니다.
“ ‘좌수(座首)’ 어른
장기(將棋)를 그냥 두는 것보다는 무슨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자네가 그 웬 말인가? 듣던 중(中) 반갑구먼. 그래 무엇을 내기하려나?”
좌수(座首)는
이웃집에서 빚어 파는 막걸리나 파전을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생각하며 웃어넘겼습니다.
“이왕(已往) 할 바에는 좀 큼직한 내기로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좌수댁(座首宅)의 머슴살이 삼 년(三年) 살기로 하고,
좌수(座首)님이 지거든 제가 좌수(座首)님 사위가 되기로요!”
“박 좌수(朴座首)”는 그제야 “고유(高裕)”의 말이 뼈가 있는 말임을 알았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딸을 자네 같은 머슴꾼에게 주겠는가?
어찌 자네 따위나 주려고 빗발치는 청혼(請婚)을 물리치고 스무 해를 키웠다던가?”
“고유(高裕)”는 “박 좌수(朴座首)”에게 무안(無顔)을 당하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고유(高裕)”가 돌아간 뒤에
“박 좌수(朴座首)”와 '고유(高裕)'가
말다툼하는 것을 방(房)에서 듣게 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뭣 때문에 고도령(高道令)을 그렇게 나무라 셨습니까?”
“그 군정(軍丁)이 글쎄 나더러 자기를 사위로 삼으라는구나.
그래서 내가 무안(無顔)을 줘서 보냈다.”
“박 좌수(朴座首)”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버님, 그 이가 어때서 그래요? 지금은 비록 빈천(貧賤)하나,
본래(本來)는 명문(名門) 사족(士族)이었고 또 사람이 듬직하고 그렇게 성실한걸요.”
오히려 “박 좌수(朴座首)”의 딸은 처녀(處女)의 수줍음 탓에 얼굴은 불그스레 해졌지만,
얼굴 두 눈에 가득히 좌수(座首)를 원망(怨望)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문(所聞)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좌수(座首)에게 혼인(婚姻)을 지내도록 하라고 권(勸)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마치 자신들 집안의 일인 양 우겨대자 좌수(座首)도 반대(反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물 한 사발 떠 놓고
젊은 청년(靑年)과 처녀(處女)의 혼례(婚禮)가 이루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 술 동이를 받아 놓고 고기와 과일을 먹고 마시며
그들 한 쌍(雙)을 축복(祝福)해 주었습니다.
화촉동방(華燭洞房)의 밤은 깊어지고
“고유(高裕)“와 신부(新婦)는 촛불 아래서
부부(夫婦)의 연(緣)인 초야(初夜)를 치뤘습니다.
”고유(高裕)“는
가난하였으나 행복(幸福)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期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색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꿈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러우나 배우지를 못하였소.”
“글을 모르시면 어떡하시나요?
대장부(大丈夫)가 글을 알지 못하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도 공명(功名)을
얻을 길이 없는 법(法)입니다.”
색시는 고유(高裕)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 년(十年)을 작정(作定)해서 서로 이별(離別)하여
당신(當身)은 글을 배워서 과거(科擧)에 오르기로 하고
첩(妾)은 길쌈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해요.
그렇게 한 뒤에도
우리들의 나이가 삼십(三十)이 되지 않으므로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우리 부부(夫婦)가 헤어지는 것은 쓰라리지만 훗날을 위해 고생(苦生)하기로 해요.”
색시는 “고유(高裕)”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습니다.
“고유(高裕)”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색시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긴 세월(歲月) 접어두었던 학문(學問)의 길을
깨우쳐 주는 색시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法)입니다.
아직도 동이 트지 않은 새벽녘에 “고유(高裕)”는 짧은 첫날 밤이 새자
아내가 싸준 다섯 필 베를 짊어지고 입지 출관향(立志出關鄕)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떠나서
어느 시장(市場)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았습니다.
돈을 아끼려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
빈 사당(祠堂) 아래서도 밤을 새워가면서
스승을 찾아 발길은 합천(陜川) 땅에 이르렀습니다.
고유(高裕)는 인품(人品)과 학문(學問)이 높아 보이는 듯한 사람에게
예(禮)를 올리고 글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청(請)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학동(學童)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을 처음 배웠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始作)했으나,
오륙 년(五六年)이 지난 후(後)에는 놀라움 속에서 “고유(高裕)”의 글은
실(實)로 대성(大成)의 경지(境地)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도 탄복(歎服)하면서 칭찬(稱讚)을 하였습니다.
“네 뜻이 강철(鋼鐵)처럼 굳더니 이제는 학문(學問)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구나!
너의 글이 그만하면 족(足)히 과장(科場)에서 독보(獨步)할 만하다.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서 과거(科擧)나 보도록 하여라.”
“고유(高裕)”는 그동안의 신세(身世)를 깊이 감사(感謝)하며
그곳을 물러나서는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방(房) 한 칸을 빌린 다음 사정(事情)을 말하여 밥을 얻어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습니다.
어느 해, 드디어 기회(機會)가 찾아왔습니다.
숙종(肅宗) 대왕(大王)이 정시(庭試)를 보이라는 영(令)을 내렸습니다.
뜻은 헛되는 법(法)이 없었습니다.
“고유(高裕)”는 처음 치루는 과거(科擧)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습니다.
그 후(後)에 “고유(高裕)”는 조정(朝廷)에서 왕(王)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왕(王)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 날,
소나기가 쏟아져서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搖亂)하였기에
왕(王)은 대신(大臣)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숙종(肅宗)은 혼자 말을 하였습니다.
“신료(臣僚)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妨害)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구나.”
그것을 고유(高裕)는 초지(草紙)에 받아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방울의 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모두 글 잘한다고 칭찬(稱讚)하였습니다.
왕(王)은 쓴 글을 가져오라 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의 자손(子孫)이냐?”
“신(臣)은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현손(玄孫)이옵니다.”
※고경명(高敬命)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으로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큰아들에겐 전주성을 사수하게하고, 금산(錦山)에서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존하였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허! 충성(忠誠)된 제봉(霽峰)이 손자(孫子)도 잘 두었군. 그래 고향(故鄕) 부모(父母)께서는 강령(康寧)하시더냐?”
“일찍 부모(父母)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妻子)가 있겠구나.”
“예, 있사옵니다.”
그날 밤, 숙종(肅宗) 대왕(大王)은
“고유(高裕)”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事緣)을 사적(私的)으로 듣고 싶어 하셨습니다.
“고유(高裕)”는 감히 기망(欺罔)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안 떠돌아다니다가 밀양(密陽)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를 들었고,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約束)을 하고 집을 떠나서
10년(年) 동안 공부(工夫)를 한 그의 이력(履歷)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허허! 그러면 10년(年) 한정(限定)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한 지가 며칠이 안 되어 아직 통지(通知)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王)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불러들여 현(現) 밀양(密陽) 부사(府使)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高裕)”로 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임명(任命)하라고 분부(分付)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유(高裕)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가 너를 밀양(密陽) 땅으로 보내니 옛날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만나되 과객(過客)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봐라. 과연 수절(守節)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아니면 기다리지 못하고 변심(變心)했는지 그 뒷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고유(高裕)”는 부복(俯伏) 사은(謝恩)하고 물러 나왔습니다.
그는 왕(王)이 명(命)한 대로 하인(下人)들은 도중(途中)에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에 옛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雜草)만 무성(茂盛)할 뿐이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 채로 수년(數年)의 세월(歲月)이 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유(高裕)”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못 믿을 것이 여심(女心)이라던가?
첫날 밤에 맺은 굳은 언약(言約)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老人)을 보고 “박 좌수(朴座首)” 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高裕)'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늙은이는 아는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박 좌수(朴座首)‘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것이 3년 전이었군요. 병으로 죽었지요.
그에겐 딸이 하나 있지요. 벌써 10년(年) 전(前)에 이 마을에서 머슴을
살았던 고도령(高道令)에게 시집을 갔는데 첫날밤에 신랑(新郞)이 자취를 감추어 버려
혼자 되었지만, 신기(神奇)하게도 첫날 초야(初夜)에 아들이 하나 생겼어요.
참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賢淑)하고도어찌나 부지런했던지, 남편(男便)이 없었는데도
크게 가산(家産)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無數)하고 건너편 산(山) 밑에
백여(百餘) 호(戶)가 넘는 대촌(大村)을 이루어 놓았어요.”
“고유(高裕)”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가산(家産)을 이뤄놓은 사실(事實)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言約)을 지키면서 자신(自身)을 기다려줬다는 사실(事實) 때문에!
'고유(高裕)'는 노인(老人)에게 사례(謝禮)하고
자신(自身)을 따르는 군속(軍屬)들에게는 주막(酒幕)에서 대기(待機)하도록 했습니다.
어둑어둑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집의 대문(大門)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求乞)하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얻어먹는 인생(人生)이 한그릇 밥을 바라고 왔소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고 있던 소년(少年)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습니다.
“들어 오세요, 손님!”
"고유(高裕)"는 그가 아들인 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 밑에서라도 좋네.”라고 하였습니다.
“아니, 올라오세요. 우리 집에서는 과객(過客)을 절대(絶對)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오라 하므로 못 이기는 척 올라가 윗목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姓氏)는 무엇이신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姓)이 있나, 남들은 고(高)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少年)의 눈이 더욱 빛났습니다.
“저, 그럼 손님 처가(妻家)의 성씨(姓氏)는요?”
“10년(年) 전(前)에 장가들어 첫 날 밤을 지내자마자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妻家)랄 것이 있을까?
그 댁호(宅號)야 ’박 좌수댁(朴座首宅)‘이었지만...”
그때 박씨(朴氏) 부인(婦人)이 사랑(舍廊)에 과객(過客)이 들었는데
성(姓)이 고씨(高氏)라고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습니다.
아들의 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確認)을 합니다.
박씨(朴氏) 부인(婦人)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들 손을 잡고 사랑방(舍廊房)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10년(年)을 떠나 살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있는 남편(男便)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래 그리던 회포(懷抱)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열살먹은 아들을 인사시켰습니다.
“고유(高裕)”는 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습니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보려 하였으나,
운수(運數)가 사나워서 베를 판 돈은 도적(盜賊)을 만나 빼앗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리걸식(遊離乞食)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서당(書堂)이 있어 글을 배우려 해도 돈이 없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소.
세월(歲月)만 허비(虛費)하고는 글은 한자(字)도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소.”
그러나 부인(婦人)은
조금도 원망(怨望)하거나 민망(憫惘)해하는 빛이 없이 사람의 궁달(窮達)은 모두
운수(運數)에 있다고 하면서 자기(自己)가 벼로도 수천석(數千石) 추수(秋收)를
장만해 놓았으니 우리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복(依伏)과 음식(飮食)을 들여 놓으면서
도리어 남편(男便)을 위로(慰勞)하여 주었습니다.
“고유(高裕)”는 음식상(飮食床)을 앞에 두고 부인(婦人)이 주는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데,
부인(婦人)의 눈길에 남편(男便)의 겉옷이 거렁뱅이의 옷 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깨끗하였으며 허리춤에는 관리(官吏)들이 차는
명패(命牌)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놀랐습니다.
“서방님! 사실(事實)대로 말씀 해주십시오.”
“나와 동행(同行)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들여 함께 먹어야 하겠소.”
부인(婦人)이 하인(下人)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舍廊房)으로 모셔 들이라 하였습니다.
하인(下人)이 나가서 문(門)밖에 서 있는 과객(過客)을 보고 들어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대로(大路)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號笛)을 꺼내어서 높이 불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십여명(數十餘名)의 관속(官屬)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堵列)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씨(朴氏) 부인(婦人)을 향(向)해
문안(問安) 인사(人事)를 올리는 등(等) 야단(惹端)이었습니다.
문(門)밖에 서있던 과객(過客)은 “고유(高裕)”의 지시(指示)를 받은 군관(軍官)이었습니다.
“고유(高裕)”는 그제야 박씨(朴氏) 부인(婦人)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夫婦)의 사연(事緣)을 들으신 상감마마께서 지시(指示)하신 것이라오.
당신(當身)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것이 결코 고의(故意)가 아니었소.”
군속(軍屬)이 관복(官服)을 가져오니 갈아입고 박씨(朴氏) 부인(婦人) 앞에
당당(堂堂)하게 선 남편(男便)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인(婦人)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日間)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洞里)의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러모아서 실컷 먹고 마시게 하였습니다.
박씨(朴氏) 부인(婦人)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田畓)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書堂)의 스승과
해인사(海印寺) 스님들에게도 많은 보은(報恩)의 폐백(幣帛)을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고유(高裕)”는 얼마 안 있어 벼슬이 경상감사(慶尙監司)에 올랐다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니,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正祖(정조) 등(等)
3대(代)를 모시면서 영화(榮華)로움이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박씨(朴氏) 부인(婦人)도 나라에서 지정(指定)한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福祿)을 누렸다고 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부부(夫婦)는 두 개의 반쪽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결혼서약은 두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한 개가 되는 것입니다.
흔히 부부는 가위와 같다고 합니다.
두 개의 날이 똑같이 움직여야 가위질이 됩니다.
가위의 날이 하나만 움직이면 가위질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부부란 호수와 같다고 합니다.
호수와 같이 피차의 실수를 한없이 흡수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서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이고 좋은 아내는 소경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못 들은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하고, 아내는 못 본 척 하는 것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기러기아빠’란 말은 자녀 교육을 위하여 아내와 자녀를 보내고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아버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기러기아빠’라고 하면 웬지 긍정적 의미보다 그렇지 않은 의미가 연상됩니다.
그런데 원래 기러기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과거 전통혼례에서는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바치는 ‘전안례’(奠雁禮)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 기러기를 바쳤습니까?
기러기는 좋은 세 가지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기러기는 시절을 압니다.
기러기는 먹이를 따라 먼 길을 가고, 추위를 피하여 이동할 줄 압니다.
둘째는 기러기는 예를 압니다.
대장 기러기를 따라 질서정연하고 일사분란하게 리더에게 불평하지 않고 이동합니다.
셋째는 기러기는 정조가 있습니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이루면 영원한 짝으로 삽니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 쪽은 평생 수절한다고 합니다.
이런 기러기를 닮아가라고 기러기를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만드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 창세기 2장18절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 창세기 2장24절 -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네가 남편을 거지처럼 여긴다면 너는 거지의 아내가 될 것이고, 네가 계집종처럼 처신한다면 남편은 너를 노예처럼 다루고, 네가 자존심을 내세워 남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품을 귀중히 여겨라. 네가 그리하면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冠)을 씌울 것이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 마태복음 19장6절 -
- 결혼 40년 축하여행(2021.11.7)-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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