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과 칼럼

“아버님! 이것 좀 보세요. 글쎄 잉어 뱃속에서 이게 나왔어요!”

가족사랑 2021. 9. 3. 14:52


서울시 도봉구 도봉동에 ‘무수울’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한자로 ‘무수동(無愁洞)’, 곧 근심 걱정이 없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도봉동에  ‘무수옹(無愁翁)’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수옹이란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을 말합니다. 

 

옛날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노인한테는 열세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아들 열둘에 딸이 한 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유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어느 날

열세 남매가 모여서 부모님 모실 일을 의논했습니다.
맏아들을 비롯한 열세남매 모두가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나섰습니다. 
결국 열세남매가 돌아가면서 부모님을 모시기로 결정이 됐습니다. 
열두 형제가 돌아가면서 한 달씩 부모님을 모시고, 
4년마다 한번씩 윤달이 찾아오면 딸이 부모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노인은 유람을 다니듯 한 달에 한 번씩 자식 집을 옮겨 다니며 극진한 공대를 받았습다.
가는 곳마다 따뜻한 방과 맛난 음식, 
그리고 손주들의 재롱이 노인을 반겼습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해서 한 마디씩 했습니다.

“정말 근심 걱정이란 없는 노인이야.”
“그러니 무수옹(無愁翁)이지.”

무수옹에 대한 소문은 돌고 돌아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임금인 나한테도 근심 걱정이 적지 않은데 근심 없는 노인이라니 이게 웬 말인고?
한번 만나보고 싶으니 불러들여라.”

그렇게 해서 무수옹은 임금 앞에 불려갔습니다.
“정말 그대는 아무 걱정이 없단 말이오?”
“몸이 건강하고 자식이 번창하며 먹고 입는 데 걱정이 없으니 마음에 거리낄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탄복을 하면서 무수옹에게 오색이 찬란한 구슬 하나를 내주었습니다.
“내가 주는 정표이니 다시 만날 때까지 잘 간직하도록 하오.”
“황감합니다.”
무수옹은 임금한테서 귀한 선물을 받아들고 대궐을 나서서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강이 하나 있어 배를 타고서 건너야 했습니다. 
무수옹이 배에 올라타자 뱃사공이 노를 저어가면서 물었습니다.
“노인장은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허허. 대궐에 가서 임금님을 뵙고 오는 길이라오. 

이렇게 선물까지 받았지요.”

그러면서 노인은 뱃사공에게 오색이 찬란한 구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사공이 구경 좀 하겠다며 구슬을 받아서 만지다가 강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구,  이걸 죄송해서 어쩝니까? 귀한 물건인데…….”

무수옹은 깜짝 놀라 당황했지만 금방 체념한 듯 말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걸요.”
하지만 거기에는 숨겨진 내막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미리 아랫사람을 시켜서 사공으로 하여금 그 구슬을 강물에 빠뜨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노인에게 근심거리를 만들어 줘 시험할 생각으로 구슬을 하나주고는 다시 가져오게 하였던 것입니다. 

무수옹이  구슬을 잃어버리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임금이  무수옹을 부른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부가 하나 있었습니다
“전에 임금이 하사하신 구슬을 반드시 가지고 오시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무수옹은 그만 아주 난처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구슬을 소홀히 다루다가 잃어버렸으니 큰 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열세 남매가 함께 모였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함께 걱정을 했지만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무수옹이 말했습니다.
“걱정들 말거라. 어떻게든 되겠지!”

임금님이 부르신 날이 가까이 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수옹의 맏며느리가

한자리에 모인 식구들의 음식상을 차리려고 잉어를 여러 마리 사가지고 왔습니다. 
며느리가 잉어 배를 가르는데 한 마리 뱃속에서 이상한 구슬이 또르르 굴러 나왔습니다.

“아버님! 이것 좀 보세요.
 글쎄 잉어 뱃속에서 이게 나왔어요!”

그러자 무수옹이 그 구슬을 보고서 손뼉을 치면서 말했습니다.

“애야!  
바로 이거야! 
이게 바로 임금님이 주신 구슬이란다.”

그러자 식구들이 다들 웃으며 아버지를 따라 손뼉을 쳤습니다.
 그리고 차린 음식을 맛있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임금님이 오라고 한 그 날이 왔습니다.

무수옹은 구슬을 품에 간직한 채 웃음을 머금고 대궐로 들어갔습니다.
무수옹이 아무 근심도 없는, 

웃는 얼굴로 임금 앞으로 나와자 임금이 의아하게 여기면서 말했습니다.

“노인장! 그 동안 잘 지냈는지 궁금하오.
 내가 준 구슬은 잘 가지고 있겠지요?”

무수옹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무수옹은 품에서 오색찬란한 구슬을 꺼내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 구슬은 강물에 떨어졌다고 하던데……”
“그랬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되찾았답니다.”

무수옹은 잉어 뱃속에서 구슬을 되찾은 사연을 임금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무릎을 치면서 탄복했습니다.

“그렇구려. 
하늘이 준 복을 인간이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소.
노인장은 과연 무수옹(無愁翁)입니다그려.”

그렇게 해서 노인은 임금한테까지 무수옹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남은 평생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근심 걱정없이 산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걱정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이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불안(不安)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걱정의 비슷한 말로는 심려(心慮), 염려(念慮), 근심(根尋) 등이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은 불안과 초조, 당황과 낙담이 일으키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걱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이런 우울증이 지나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걱정’을 뜻하는 영어 단어 ‘worry’는 ‘사냥개가 짐승을 물고 흔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걱정’은 삶을 물고 흔들어 서서히 죽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을 해서, 자기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

또는 '제 키를 한 규빗인들 크게 할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옷 걱정을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로 차려 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 마태복음 6장 26-34절 -

 

예수님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공중에 나는 새를 보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먹이를 준비해서 주는“새장 안에 갇힌 새”가 아닙니다. 

새장 안의 새를 보라고 하지 않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열심히 날고, 일하는 새를 보라는 의미입니다. 

공중을 날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새는 하나님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비록 미물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생존하기 위해서 공중을 나는 새는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사람들이 물을 주어서 키우는 온실에 핀 백합화를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친 들에 몸을 맡기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고 자라는 백합화를 보라는 말입니다. 

어떤 때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홍수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비가 너무 오지 않아서 태양 볕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어서 뽑힐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꽃이 필 계절이 오면 들에 서 있는 백합화는 여지없이 아름답게 꽃을 피웁니다. 

이렇게 노력하고 몸부림하는 미물들에게조차도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에게 길을 닫으시겠는가 하는 겁니다. 

 

우리의 내일이 아무리 암울하고 답답하게 보여도 염려와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가 살아가는 방법을 보고, 들에 핀 백합화의 이치를 깨달으면 내일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하지 않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우리가 근심해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받아들여야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일에 대한 꿈과 계획이 없이 산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가올 내일을 예측하고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내일을 위한 계획과 내일에 대한 걱정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일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과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평안!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