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장 1∼3절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열심은 사실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가히 극성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열심(熱心)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이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한 자만이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중요한 교리를 밝혔습니다.
그리고 10장에 와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근본 이유를 하나 더 정리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열심>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많을수록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심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너무 지나쳐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입각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열심, 잘못된 열심을 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도 그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는 사도 바울의 <열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립보서 3장 5∼6절)
바울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과거에 자신의 동료들보다 지나치게 유대교를 믿어서, 조상의 전통에 누구 보다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때에 자신이 '열광주의자'였다고 합니다.
율법과 조상의 전통에 대한 열심을 품은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은 종교적 열심당원과 같았습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을 보십시오!
그들의 열심은 참으로 무서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특히 몰몬교나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하는 열정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진리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열심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서기 350년 경 로마 교황을 지냈던 율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고결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성자로 칭호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어떤 사람이 찾아 왔습니다. 율리우스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열심이 많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열심을 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리우스는 가슴에서 열심 덩어리를 꺼내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을 저울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열심 덩어리의 무게가 100근 이라고 했습니다. 율리우스는 자기의 열심이 그렇게 많은 무게가 나가는 것을 보고 매우 흐뭇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그 열심 덩어리를 뜨거운 물 속에 넣고 녹였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의 구성 성분을 밝혀주었습니다. 성분은 야심이 30근, 자기자랑이 25근, 명예심이 40근, 하나님 사랑이 5근, 합계 100근 이였습니다. 열심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을 사랑해서 내었던 열심은 고작 5근 밖에 안 되는 것을 본 율리우스는 너무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바른 열심과 잘못된 열심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그 열심이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열심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아는 열심인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 사람을 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지 묻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는 열심인지, 아니면 사랑이 결여된 열심인지 묻는 것입니다.
바른 열심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말씀과 뜻에 의해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만 있고 사랑이 없으면 그는 흉기를 든 공격적인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열심’이라는 것을 말할 때 늘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첫째는 속도입니다.
열심은 속도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 보면 뭐든지 해보려고 하고, 뭐든지 앞서가려고 합니다.
둘째는 방향입니다.
속도뿐만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속도가 나면 날수록 방향을 잘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면 어디로 튈는지 모릅니다.
기업 경영 컨설터이며 리더쉽 연구가인 스티브 코비(Seteve Covey)박사의 말입니다.
"시계를 보지말고 나침판을 보고 살라!"
목표와 방향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심에는 바른 방향과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열심”의 헬라어 단어는 '젤로스' (ζῆλος) 입니다.
헬라어 ζῆλος(젤로스)는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젤로스'는 긍정적인 의미로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강렬하고 집착적인 열의와 욕망을 뜻합니다.
열정(passion) 혹은 열심(zeal)으로 번역됩니다(롬 10:2; 고후 7:11; 9:2; 빌 3:6).
또한 젤로스(ζῆλος)는 경쟁자나 다른 사람, 다른 집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의식에서 오는 시기(envy)와 질투(jealousy)라는 부정적 뜻으로도 사용됩니다(행 5:17; 롬 13:13; 고전 3:3; 고후 12:20; 갈 5:20; 약 3:14).
열심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지? "
"내가 열심을 내는 목표가 뭐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지?"
운전을 할 때, 30km 아니 60km 미만으로 주행할 때는 앞에 장애물이 갑자기 등장해도 쉽게 멈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핸들을 옆으로 조금 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도가 높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100km 이상 속도로 달려보셨나요?
그때는 장애물이 나타나도 쉽게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차선을 넘어서서 어디로 박히게 될지 조심스럽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열심을 쏟아 놓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 옛날의 열심에 사랑이라는 목표가 들어가자 방향이 결정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그 열심이 지속되었습니다.
그의 열심의 크기나 뜨거움은 예수님을 믿기 전이나 이후나 똑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고백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립보서 3장 5∼9절)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자기의 가문을 자랑했습니다. 학벌을 자랑했습니다. 신분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엄청난 열심은 있었지만 거기에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법 조항처럼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역사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자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이 넘쳐났습니다.
믿기 전에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던 독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이후에는 사랑과 용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남을 배려하며 포용하는 넉넉한 인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열심이 있는 자리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열심이 있는 자리마다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그의 열심이 있는 자리마다 힘든 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열심>에 탄식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유대인들이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으며 자기의 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는 탄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열심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열심은 지식을 좇는 열심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달리긴 달렸는데, 한참 달려가다 보니까 엉뚱한 곳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방향이 먼저 바로 설정되고 그 후에 속도가 더해져야 합니다.
만약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속도만 높이고자 애를 쓴다면 정반대 혹은 잘못된 길로 더욱 멀어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도 올바른 지식이 밑받침 되어야 합니다.
바른 지식이 없이 열심만 앞세우다보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에 기초할 때 올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열심은 올바른 지식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열심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평안!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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