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썼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개역 개정)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번역)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 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공동번역) - 로마서 10장 3절 -
바울은 유대인들이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좇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3절에 보충적인 설명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대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심은 알고 보니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義)는 정의(正義, justice) 혹은 공의(公義, righteousness)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부담스럽고, 두려우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의'는 그런 의를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의를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나의 죄를 용서하여 의롭다 여기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인에게 용서를 베푸시고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는 달콤한 의, 향기로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넘치는 하나님의 의,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의는 우리의 신분을 바꿀 뿐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값없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조건입니다.
이웃을 향한 겸손의 조건입니다.
범죄한 타인을 향한 용서의 조건입니다.
영적 성숙을 향한 소망의 조건입니다.
반면
바울이 말하는 '사람의 의'는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자기 의'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이 주신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타고난 의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으로 태어났으니까 나면서부터 의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구원받는다고 믿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혈통을 자랑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지키기에 힘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바울이 볼 때 유대인들의 율법 신앙은 결국 '사람의 의'에 머물렀습니다.
사람이 의를 세우려고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의’를 우습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잘난 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고상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없으면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율법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특별한 분들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귀한 일들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올바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습니다.
뭘 모르고 무조건 헌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3절).
그렇습니다.
보기에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뭘 모른 채 열정적으로 행하기만 하다보면 결국 자기 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의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누가복음 18장11∼12절)
예수님을 만나기 전, 즉 회심하기 전에 바울이 그런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지나치게 열심을 낸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14절에 보면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이 있었는가 하면, 초대교회 집사였던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주동했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다메섹까지 붙잡으러 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열심을 내었지만 그의 이 열심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을 방해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열심은 살리는 열심이 아니라 죽이는 열심이었습니다.
세우는 열심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는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의 열심은 3절에 있는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고’는 헬라어로 아그노에오(ἀγνοέω)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무식하다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듯이 그들은 자기 의를 세우는데 힘을 써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열심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서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힘써”라는 단어를 새번역은 “힘을 씀으로써”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그냥 하나님의 의와 멀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움’을 세우려고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멀리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의도적으로 멀리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의’는 십자가와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천국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처럼 자기 의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쉽게 빠지는 시험거리입니다.
혹시 내가 교회에 다니니까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 다니는 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힘쓰지만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의는 거부하지 않습니까?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교회에 열심히 다닐수록 교만해집니다.
이미 교회활동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예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절대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교만해지면 자기 의를 믿고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않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바로 알아야 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우리의 혈통이나 종교업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기 바랍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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