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70)-구원을 받으리라

가족사랑 2021. 6. 1. 16:53

구원을 받으리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로마서 10장 9∼10절 -

 

우리말 국어사전에는 구원(救援)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줌.'

두번째로는 '기독교에서,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 내는 일.'

구원은 위험이나 고통으로부터 구출되는 것입니다.

구원한다는 것은 구출하는 것, 혹은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승리, 건강, 또는 보존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구약 성경 시편 37편을 보면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을 도우셔서 구원하여 주신다. 그들이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기에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셔서 구원하여 주신다(시37:3940, -새번역)

이 땅에서 재난을 당할 때에 재난으로부터 구해 주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자들에게서 건져내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이란 신앙적인 의미의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악과 고난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거짓, 불의, 증오, 개인적인 결핍이나 아픔, 이웃과의 갈등,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갈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악과 고난에 둘러싸여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악한 자들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죄악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영혼이 정결해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 악한 자들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죽은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어떻게 악한 영에게 벗어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평화를 누릴 것인가의 문제도 포함합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기독교만의 관심 사항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들도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는 기본적으로 구원론적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구원론적입니다.

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예술도 구원을 목표로 합니다.

사람들은 예술 행위를 통해서 어떤 궁극적인 기쁨과 자유를 맛보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구원의 속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차원의 구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로마서 10장 9절 - 


지금 바울은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구원을 주제로 논쟁을 벌이는 중입니다.

이 논쟁을 효과 있게 하려면 당연히 그들이 잘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을 집중적으로 인용했습니다.

바울은 요엘, 신명기, 그리고 이사야서를 인용했습니다.

8절에서 13절까지 아주 짧은 구절에서 바울은 세 군데의 구약성서를 인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과 논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율법 완수가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알고 율법을 실천하는 유대인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크게 보면 구약성경 전체가 율법이고, 좀더 좁히면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모세 오경이 율법입니다.

더 압축하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입니다.

모세는 그 십계명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전반에서 지켜야 할 법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이 율법에 따랐습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질서를 세우는 일도 다 율법을 따랐습니다.

심지어 음식 규정도 거기에 포함됩니다.

깨끗한 먹을거리와 더러운 먹을거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윤리에 대한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성폭력에 대한 처리 방식도 나옵니다.


율법을 실천함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상식적으로 옳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법대로 합시다.’와 똑같습니다.

법을 지켜야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갑니다.

자동차 통행이 잦은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거나 운전자들이 신호등을 무시한다면 사거리는 아수라장이 될 겁니다.

학교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은 정한 날과 시간에 학교에 나와서 공부해야 하고, 선생들은 자기가 맡은 수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게 학교 규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걸 바르게 실천하면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걸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이런 전통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보통 수준의 유대인이 아니라 율법 근본주의자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빌립보서 3장 5-6절 -

 

그러나 바울은 예수를 믿고 나서 이 율법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율법에는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법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을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자기에게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법과 제도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절망하거나 아니면 위선적이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 로마서 7장23절, 새번역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뒤에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믿음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 로마서 10장 9절, 새번역 -

 

온갖 종류의 규범과 규칙을 죽을 때까지 지키는 율법의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의 길입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 되는 길입니다.

율법으로 얻는 구원은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은 믿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전자는 혼신의 노력이 필요한 길이고, 후자는 그런 노력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믿음의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믿음의 길보다 오히려 힘든 율법의 길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길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직장에 충실하면서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별로 열심히 일하지도 않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이입니다. 누구에게 더 신뢰가 갑니까? 당연히 많은 수고를 하고 높은 연봉을 받는 젊은이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도 바로 그와 같습니다. 율법도 지키지 않고 단순히 예수를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당시의 유대인이었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자칫하면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소위 값싼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이 전혀 없으면서 말로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값싼 은혜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본회퍼는 독일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비판했습니다.

히틀러 나치의 광기 앞에서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구원받았다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되냐는 비판입니다.

군사독재와 자본주의의 광기 앞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기복신앙과 내세신앙에 떨어졌던 지난 70년대와 80년대 한국기독교도, 사실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구원 이야기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입니다.

바울의 구원 이야기가  값비싼 이유는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보다 더 비싼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 에베소서 2장 8∼9절 -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문제에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의 율법적인 수고가 필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의 생각이 이미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요엘을 비롯해서 신명기와 이사야를 인용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기본적으로 종말의 차원에 속합니다.

종말은 보통 마지막의 때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일 뿐만 아니라 시작이기도 합니다.

낡은 세계로는 마지막이지만 새로운 세계로는 시작입니다.

종말은 궁극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를 가리킵니다.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종말에 완성될 궁극적인 생명은 부활입니다.

그 부활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 안에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 생명의 토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종말에 일어날 궁극적인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전한 믿음입니다. 자학적인 고행이나 자기만족적인 실천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그 어떤 것도 부가적으로 필요한 게 없습니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바울은 유대교 및 이와 근사한 유대 기독교와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이런 투쟁의 흔적이 로마서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신앙 선배들의 투쟁 덕분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복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예배를 드린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예배에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단계로 나갑니다.

입으로 하는 시인과 마음으로 하는 믿음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런 믿음으로 공동체를 이룹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근거한 유대의 회당공동체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기독교의 교회공동체를 통해서 구원을 약속으로 받게 되었다고 과감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예배를 통해서 종말론적 구원에 신비한 방식으로 참여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 번창교회 설립(1988년)후 첫번째 성례식에서 세례를 받은 자매가 가족들과 강릉을 방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