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 로마서 10장 9∼13절 -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남자든지 여자든지, 그 사람이 주인이든지 종이든지, 그 사람이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그 사람이 잘난 자든지 못난 자든지,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자든지 악을 행하는 자든지 반드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부르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진짜로 주여, 주여 라고 부르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 가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주님의 이름은 부른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100여년쯤 살면 죽으니까 당연히 인간이 죽는 줄 알지만 그 때는 1000여년씩이나 살던 시대이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잘 몰랐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인생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매일매일 사람들이 죽어가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이 참 이상합니다.
첫번째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함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죄에서 나를 건져주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데 그 이름을 불러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그렇게 급해서 죽음 앞에 서 있는 인생이 그 죽음의 절벽 앞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음을 알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고 그 죽음에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 가지 종교들도 만들어 보고 훌륭한 사람을 교주로 세워보기도 하면서 이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영생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한 맹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구걸로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맹인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사람이 소리 지르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더욱 더 크게 소리 지르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데려오라고 하시고,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 맹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8:35∼43)
이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전 인격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주 예수를 갈망하는 자로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미련합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나는 절망합니다.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고 고백하며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이 주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맡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은 단순한 동의나 말로 그치는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자신을 맡기는 신앙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마당에 있는 큰 돌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돌은 크고 아들은 키도 작았고 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날씨는 더웠습니다. 아들은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돌을 움직이려 했으나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있는 힘을 다해 돌을 잡아당기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은 하루 종일 돌과 씨름하다가 결국은 아버지께 와서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최선을 다했느냐?” 아들은 아버지에게 “네, 물론이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아직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너는 내게 와서 도와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버지를 의지하고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3∼14절).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고 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죽는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구원의 약속입니다.
요한 1서 5장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생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영생에 대한 확신을 소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생은 다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영생이 아닌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2∼3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셨습니다.
그 처소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들어가도 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복음,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기쁜 소식은 영생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데 있습니다.
영생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로마서 6장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23절)
영생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영생은 공로나 자격이나 물질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 9∼11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후회하는 때가 결코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은 귀한 이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이요, 도움을 주시는 이름이요, 기도 응답을 주시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부르면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불러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가 아주 조용하게 주님께 기도함으로써 구원받도록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기도하도록 그를 도울 뿐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도록 돕는다면 그의 구원의 체험은 훨씬 더 강할 것입니다. 조용하게 기도하도록 돕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받게 하지만 그렇게 풍성하지는 않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는 길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 풍성하고 더 철저하게 구원받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자신을 열고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근심에서 구출받고(시18:6, 118:5) 환난에서 구출받고 (시50:15, 86:7, 81:7) 슬픔과 아픔에서 구출받기 위함입니다(시116:3-4).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도 어떤 환난이나 질병을 만날 때에는 자신이 주님을 부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생활에 환난이 없을 때 우리는 주님을 부르는 것에 대해 논쟁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이 닥칠 때 아무도 우리에게 주님을 부르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히 부를 것입니다.
주님을 부름은 우리를 구출하고 해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과 환난 중에 있을 때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평안!
- 하늘가는 길, 강릉남대천에서. 산돌의집 장득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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