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3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복음 7장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10계명>이 있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쪽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건 바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 내용들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편한 것을 선택하지 말고, 힘든 쪽을 선택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참 중요합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선택의 문제를 뛰어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어느 문으로 들어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하지 않고 딱 찍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선택이 아니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 길은 길 옆 좌우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낭떠러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아찔할 것입니다.
좁은 문은 문으로 통과하기 위한 길, 좌우편에 틈이 없는 상태에서 통과해야 하는 그런 문을 의미합니다.
“좁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스테노스(στενός)라고 하는데, 장애물이 있으므로 ‘서다’(히스테미, ἵστημι) 라는 단어가 원형입니다.
보통 ‘좁다’는 의미는 “무엇을 이룩해야 되는 차원, 즉 나만이 해야만 통과해야 하는 길과 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만이 지속해야만 되는 과정을 지나가야 하는 통로이므로 고통도 있고 이에 따르는 외로움이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는 운동선수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좁은 문은 금욕이나 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은 14절에서 말씀하듯이 ‘생명의 문’입니다. 구원의 문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면서 각 성과 촌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눅13:23)
그때에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을 구원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 즉 구원의 길로 들어가기를 원하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좁은 문, 즉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후에는 열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 즉 구원의 기회가 한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마치 노아 때에 노아가 지은 방주의 문과 같습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홍수가 있을 것이며, 따라서 방주를 짓고 그 안으로 피해야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를 방주에 태우신 후에, 친히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고한대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수많은 폭우로 온 세상에 덮일 때가 되서야 사람들은 노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직접 방주의 문을 닫으신 후에는 아무도 그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후회를 해도 더 이상 방주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생명의 문을 왜 ‘좁은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이 문은 들어가기가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구원받는 일은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그렇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길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신앙의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길이 좁은 문의 길이 된 이유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들을 거부합니다.
내가 확고하고 안전하다고 하여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내어놓아야 하는 자기부인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세상의 넓은 문, 큰 흐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세상 방식대로 살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는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도 받습니다.
때로는 내 자신이 바르게 살고 있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외로움도 느낍니다.
2.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노아의 삶을 보십시요!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을 버리고 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고독한 신앙의 투쟁을 하였습니다.
방주를 만드는 일은 실로 그 인생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랐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당시 모든 세상 사람들이 비참하게 멸망할 때 홀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는 좁고 협착한 길로 갔습니다. 그 길은 생명 길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방랑자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들의 삶과 전혀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좁고 협착한 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광야를 가는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광야 길에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아니 순간순간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문제가 되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 가신 길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죄악의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좁은 길로 가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처럼 외로운 길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두 가지가 선결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개인적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하나님 중심적 삶을 의미합니다(마6:33).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 위에 자신의 욕심을 못 박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또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은사를 따라 주어진 사명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입니다.
은사를 따라 일하면 아무리 힘든 것이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과 이웃에게 넘치는 유익을 안겨줍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을 마무리하는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지키고 순종하는 삶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생명의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화려하고 멋진 것들을 좋아합니다.
할 수 있으면 크고 화려하고 멋진 문으로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보기에 화려한 것들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열매도 탐스러웠습니다.
롯이 선택한 소돔도 에덴동산 같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진실한 믿음 가진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겉보기에 화려한 생활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초라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보기에 잠간 화려한 것처럼 보이나 그런 멸망 길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비록 겉보기에는 좁고 초라하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걷는 길은 안전하고 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다수가 선택한 것이 무조건 옳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생명의 길을 걸으려면 다수의 군중에 섞이지 말고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오해를 받고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담대하게 거기서 나와 믿음의 소수 편에 서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때로 생명 길을 가고자 한다면 고생과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은 협착하여 걷기에 불편하고 힘이 많이 들며, 찾는 이가 적어 외롭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못을 박아 놓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몸의 쾌락을 위해서 마련된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몸의 쾌락보다 영혼의 순결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비록 무시당하고 천대당하더라도 성도는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길 끝에는 생명의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대충 믿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철저하게 잘 믿기를 원하십니까?
교회생활을 건성 건성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똑 부러지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잘 믿으려면 고생과 불편을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들은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건성건성 신앙생활을 했다면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겠습니까?
좁은 문을 향해 그 좁은 길을 외롭게 걸었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순교의 피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풍성한 복, 신유, 기적 받는 것만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좁은 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을 걸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 좁은 길은 길 옆 좌우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는 길입니다.
낭떠러지길입니다.
이 길에서 뒤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진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거기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도 좁은 문, 생명의 문을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납시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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