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31)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이혼율이 1위입니다. 한 부모가정도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이혼율 증가 원인은 대표적으로 성격차이, 경제적 문제, 부정행위, 종교 문제 고부간에 갈등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면서도 남의 탓만 하기가 일쑤입니다. 보통 사고가 나면 대부분은 양쪽 모두에게 과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상대방의 잘못만을 목청 높여 따지고 듭니다. 상대방이라고 가만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나섭니다. 그래서 당연히 싸움이 되고 길은 난장판이 됩니다. 길이야 막히든 말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든지 말든지 아랑곳 않고 흥분한 두 사람은 이제 사건의 처리보다는 감정 싸움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맙니다.
이렇게 남의 탓만 하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잘못만을 눈여겨보고 떠버리는 사람은 시기와 미움, 다툼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엇인가가 항상 불만스럽고 옆 사람이 늘 못마땅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을 좋아해 줄 이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연 외로울 밖에 없습니다. 그는 점점 더 괴팍해져만 갑니다.
반대로 내 탓을 하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사람에게 끝까지 다툼을 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내 탓이라는 한 마디 말에 화해가 됩니다. 화해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흥분으로 끓어올랐던 감정도 가라앉게 됩니다. 평화롭고 온화한 인간관계가 만들어집니다.
1.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절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다’는 단어는 헬라어 크리노(κρίνω, krino)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유죄 판결을 내리다, 벌하다, 판단(判斷)하다, 비판(批判)하다, 심판(審判)하다, 판결(判決)하다, 재판(裁判)하다는 뜻입니다.
‘크리노’를 누가복음 12장에서는 ‘판단’으로 번역했습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눅1:57).
요한복음 7장에서도 ‘판단’으로 번역했습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요7:24).
또 요한복음 18장에서는 ‘재판’으로 번역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
이처럼 ‘비판’의 뜻은 ‘판단’, ‘정죄’, ‘재판’ 등으로 넓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외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신들의 기준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행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며 신앙이란 이름으로 자기들과 같은 생활을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고 비판하며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의 전통, 유전, 지식, 문화적 배경으로 신앙적 삶의 기준을 높이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백성들을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정이나 교회에 한 사람만 있어도 여러 사람이 상처를 입고 주위가 피곤해집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라온 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혹은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지식의 배경을 기준으로 평신도, 직분자들과 교역자들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바리새인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러한 편견적인 판단은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나오는 죄요, 교만의 죄요, 수군수군하는 죄요, 비방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경멸하는 죄를 범하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로마서 3장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죄인들끼리 서로 의인인척 하며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정부는 대통령 취임식 때 대통령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택해 취임 선서를 한 후, 성경에 입을 맞춤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답니다. 링컨 대통령은 취임식 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7:1)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변호사 시절 링컨은 잘난 척 잘하는 <제임스 쉴즈>를 못 마땅히 여겨 익명으로 신문에 비난의 글을 올렸다가 쉴즈의 목숨 건 결투 신청을 받고 결국 사과를 통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링컨은 마태복음 7장1절을 인생의 좌우명 삼았다고 합니다.
탈무드에는 ‘남을 비방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비방은 세 사람을 죽입니다. 비방하는 사람,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비방 당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판단 받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 판단 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판단해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판단 받기 전에 사람들로부터도 자기가 판단한 기준에 따라 판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판단한대로 판단 받습니다.
여기에 ‘헤아리다’는 말은 ‘재다’, ‘측량하다’, ‘계산하다’는 뜻입니다. 누가 더하고 누가 덜하고, 누가 더 많고 누가 더 적고 하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무엇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남을 판단할 자격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들보’는 집의 지붕에 올리는 통나무입니다. 반면 ‘티끌’은 먼지처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들보처럼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이 지은 티끌만한 죄와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마치 100억을 도둑질 한 사람이 100만원 도둑질한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에게 작은 실수를 한 이웃들을 저죄하고 용서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무자비한 일을 할 때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의 작은 실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실수와 죄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18장-일만달란트와 백데나리온
우리가 조금만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와 실수를 범하는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지은 무수한 죄와 실수를 덮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이 행한 작은 죄와 실수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기 죄와 허물은 간과하고 남의 허물은 비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남을 판단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있는가?”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사람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8:4~5)
예수님께서 무엇라고 하셨을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여인이 돌에 맞아 죽었을까요?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9)
우리는 자기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게 대하면서, 남의 죄와 실수는 크게 비판합니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고 하듯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은 자로서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일을 심판하실 분은 온전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함으로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판단력은 매우 부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전체를 볼 수도 없고, 또 사람들의 마음과 동기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나타난 일을 가지고 이웃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판단은 매우 부정확하고 왜곡된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 우리는 편견이나 감정에 휘말려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남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일을 그치고, 모든 판단을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처럼 편견이나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잘못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누가 보아도 공정하며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만족할 수 있도록 완전하게 심판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실수할 때에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를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남이 실수할 때에 우리도 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는 정죄의 영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개화기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신학문을 배운 어느 신식 부부가 있었습니다. 세련된 양장을 입고 집안의 가구도 모두 신식으로 갖춰놓고 사는 보기 드문 인텔리 부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집에는 몇 대의 가족이 함께 사는 아주 구식 그대로의 대가족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남부러울 것이 없던 이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저녁만 되면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나고 다툼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는데 어쩌다 조용한 날이면 썰렁한 집안 분위기가 사람을 냉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집에서는 언제나 떠들썩하니 웃음꽃이 그치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식구도 많았지만 늘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는 그 동네에 자랑거리였습니다. 하루는 젊은 부부가 옆집의 나이든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어르신, 어떻게 하면 화목하게 살 수 있는지 비결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보다 배운 것도 많고 가진 것도 훨씬 많으신 분들인데 저희가 가르쳐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찾아온 부부가 하도 간절히 요청을 하자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비법이란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우리 집에는 모두 자기 탓을 하는 바보들만 산다는 것이지요. 며칠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지요. 우리 집에는 어린 며늘아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침에 마누라가 솥에 쌀을 안치고 그 며늘아기에게 불을 때라고 이르고는 잠시 텃밭에 볼일을 보러갔지요. 어린 며느리는 별 생각 없이 장난을 치며 불을 때다가 그만 밥 타는 냄새에 깜짝 놀라서 솥뚜껑을 열어보니 밥이 반이나 타 있었지 뭡니까? 이렇게 가난한 집에서 밥을 태웠으니… 큰일을 낸 며느리는 주저앉아 울기만 했습니다. 그 때 할머니가 돌아와서 울고 있는 며느리를 보고 깜짝 놀라 물었지요. ‘아가, 무슨 일이냐?’ 시어머니께 차마 대답을 못하고 며느리는 솥을 가리키고 훌쩍거리기만 했습니다. 솥뚜껑을 열어보고 밥이 탄 것을 본 할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며느리를 다독거리며 말했지요. ‘늙은 내가 눈이 어두워서 밥물을 잘못 부어 밥이 타고 말았구나.’ 그런데 밖에서 들어오던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와 아내에게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아침에 귀찮아서 물을 조금만 길어 놨더니 이런 일이 생겼네요. 제 잘못입니다.’ 조금 후에 이 이야기를 다 전해듣고 제가 말했지요. ‘내 잘못이 크다. 근력이 부족해서 장작을 너무 굵게 패 놨더니 불이 너무 과했구나.’ 우리 집은 이렇게 늘 자기 탓만 하는 식구들이 있을 뿐 별 다른 비법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고 하셨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자기를 의롭고 상대를 잘못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비판은 곧 심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또 예수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3절)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내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눈에 티끌을 빼내십시오.
내 눈에는 들보가 있고 남의 눈에는 티끌이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고 칭찬하십시오.
지옥의 언어는 불만, 원망, 미움입니다.
천국의 언어는 미안해요, 괜찮아요, 용서해요, 감사해요, 사랑해요입니다.
서로 비난하면 가정이 지옥되지만, 서로 칭찬하면 가정이 천국됩니다.
서로 비난하면 교회가 지옥 되지만, 서로 축복하면 교회가 천국 됩니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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