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강해

산상수훈 강해(30)-염려하지 말라

가족사랑 2021. 3. 22. 16:00

산상수훈 강해(30)

 

   염려하지 말라  

 □ 마태복음  6장 25∼34절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당신은 나를 위하여는 조금도 염려하지 말아 주소서. 한 덩어리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물의 맛이야말로 신선의 요리요, 천사의 떡 맛이외다. 당신은 엄동설한의 고생을 염려하나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일꾼인 나를 밥을 먹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의 식사량을 본래 적게 하셨으니 이 밥으로도 내게는 만족이요, 나의 키를 적게 하심으로 옷과 이불은 나의 발등을 덮으니 이만하면 만족이 아닐까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곱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이며 일하는 일꾼을 밥 아니 먹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께서는, 적게 믿는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고 꾸지람을 하십니다. 염려할 것은 다만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없는 것을 탄식할 뿐이오니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외다. 안심하소서.”

 1942년 10월14일 손양원 목사님이 옥중에서 아내에게 쓴 편지 중 일부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하신 공중의 새들, 들의 백합화, 그리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도 잘 돌봐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물론 손 목사님의 감옥생활은 비참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근심, 걱정, 염려투성이입니다. 

어디에나 근심이 있고,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먹고 살아가는 일 때문에 염려가 많습니다. 

이처럼 살기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염려없이 살아가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염려하지 말라

 

  염려는 영어로 <worry>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독일어 <부르겐>(wurgen)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의미는 ‘질식시키다’ 혹은 ‘목을 조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염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림나테(μεριμνατε)’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무엇에 대해서 깊이 골똘하게 생각하다. 어떤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어떤 일에 집착하다가 마음이 혼란스럽게 되고 이로 인해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걱정이나, 근심, 염려는 인간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몸과 정신을 병들게 하며 영혼을 빼앗아 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마음을 나누어지게 만들고 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께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많은 것을 대접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손이 부족하게 되자, 한가롭게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 해도 족하니라”(눅10:41~42). 

 

‘한 두 가지 음식만 준비해도 좋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생활에 대한 염려로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입니다. 

지금도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데 지금부터 2000년 전이라고 하면 그 생활의 궁핍함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했을 것입니다. 

한달치나 일주일치 양식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먹을 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그런 가난한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의식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식주(衣食住)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의식주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한 것은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다가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합니다. 

염려는 어떤 문제도 풀지 못합니다. 

마치 자동차를 운전할 때 기아를 넣지 않고 엑셀레이터만 밟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염려는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7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미래를 다스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염려는 오로지 오늘을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염려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염려는 실상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염려는 우리를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당면한 문제를 과장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문제를 더욱 더 크게 만듭니다. 

염려하는 것에 대하여 더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더욱 더 커져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의 몸은 염려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를 하게 되면 온갖 질병에 걸리게 됩니다. 

잠언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자율신경계가 있는데 염려나 근심을 하게 되면 그 자율신경 중 일부분이 우리의 심장을 파괴하고 위장을 파괴하고 대장, 소장과 각 신체 기관을 파괴합니다. 

우리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하면 우리 속에 있는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서 우리를 파괴합니다. 

때문에 화를 내면 심장이 뛰고 마음이 상하면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위궤양, 요통, 두통, 불면증 등 여러 가지 질병을 걸리게 합니다. 

염려는 우리에게서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2.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6절을 보십시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공중의 새보다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까마귀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참새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비둘기보다도, 제비보다도 오리새끼보다도 귀한 존재입니다. 

 

지구상에는 조류가 약 1000억 마리 정도 산다고 합니다. 

그 많은 새들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상상이 잘 안됩니다. 

제비는 새끼 한 마리에게 하루 100번 이상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합니다. 

숫놈과 암놈이 번갈아 가면서 곤충을 잡아다가 100번 이상 먹인다고 하니 제비 한 쌍이 새끼 다섯 마리를 키운다고 하면 하루에 줄잡아 500마리의 날파리 곤충을 잡아서 새끼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제비는 새끼를 키우는 3주간 동안 무려 1만 마리 이상의 날파리를 새끼에게 먹입니다. 

우리보고 그렇게 제비에게 먹을 것을 주라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비가 한 두 마리입니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모든 날짐승을 다 먹이고 키우십니다. 

  

시편의 시인은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시50:10~11)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하찮은 새도 이렇게 기르시는데 새보다 훨씬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육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나는 공중의 새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책임지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지켜주십니다.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돌봐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져주십니다. 

 

시편121편에는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5~8)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 <모든> 것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될까요? 

의사에게 지불할 돈도 포함될까요? 

월세도 포함될까요? 

사업자금도 포함될까요? 

자녀의 교육비도 포함될까요? 

나의 결혼문제도 포함될까요? 

네, 모두 다 포함됩니다. 

영적인 필요도, 경제적인 필요도, 건강상과 인간 관계상의 필요도 다 포함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 모든 것이 다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40년 광야생활에 내내 매일 아침마다 만나를 비처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에 인도해 주시며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을 때에 고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걱정해야 합니까?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3.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염려’는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는 병균과 같습니다. 

그리고 염려의 밑바닥에는 ‘불신앙’이라고 하는 엄청난 죄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30~32절을 보십시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처럼 먹고 사는 걱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고, 환경이 아무리 안 좋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는 존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애통하면서 고난을 당하면서 사는 것이 오히려 복인 줄을 알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재물이 있고 없음에 연연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을 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목숨,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보호하고 지키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늘 염려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필요한 것들을 다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이 그런 걱정을 하지만 믿음을 가진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나라의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늘 염려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나라를 구하고 그 하나님나라에서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면 덤으로 이 세상의 행복들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이 하신 말씀은 반드시 책임을 지시고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현재는 물론 영원한 미래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장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4장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래도 해결 안 되면 간구하고, 또 하나님 앞에 부르짖다가 보면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적은 자가 믿음이 커지고 믿음이 약한 자가 믿음이 강해지고 믿음이 강해지면 마음의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심거리가 생길 때마다 ‘아하! 기도하라는 사인이구나’,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비상등을 켜주셨구나’고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염려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라는 말은 우선순위를 강조해 주는 말입니다. 

먼저 할 것이 있고 나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우선순위를 소중히  여기고 행할 때 하나님의 더하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먼저입니까, 내가 먼저입니까? 

예배가 먼저입니까, 세상 재미가 먼저입니까? 

십일조가 먼저입니까, 내 쓸 것이 먼저입니까?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을 먼저로 정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시는 축복을 범사에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산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