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16)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마태복음 5장 43∼48절 -
야구 경기에서의 완전시합을 ‘퍼펙트 게임’(perfect game)이라고 합니다. 퍼펙트 게임(Perfect Game, 완전 경기)은 선발 투수가 9이닝간 타자를 단 한 명도 루상으로 보내지 않고 승리한 경기를 말합니다. 이 조건을 달성하려면 선발 투수는 안타, 볼넷, 몸에 맞는 볼은 물론 실책 등 어떤 이유로도 상대편 타자를 1루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27명을 상대하여 27명을 전원 아웃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진기록에 속합니다.
볼링에도 ‘퍼펙트 게임’이 있습니다. 12번의 경기중 12번 연속 스트라이크를 잡아 300점 만점을 기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경기를 ‘퍼펙트 게임’, ‘완전한 경기’라고 합니다.
골프 경기에도 퍼펙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홀인원입니다. ‘홀인원(hole in one)’이란 말 그대로 한 번에 공이 홀 컵으로 쏙 빨려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홀인원에 성공하면 3년간 재수 좋은 것은 물론 만사형통이라고 해서 해당 골퍼와 악수하려고 줄을 설 정도로 아마추어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샷으로 통합니다. 홀인원은 프로세계에서도 마치 산 속에서 산삼을 캐듯 횡재한 샷이라고 부릅니다.
1. 온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읽은 성경 마지막 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어성경은 이 ‘온전’이라는 말을 ‘perfect’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페펙트하듯이 너희도 퍼펙트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온전하다’는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온전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τέλειος(텔레이오스)’라는 말로 노동, 애씀, 성장, 마음 및 도덕적 품성, 등등에서 ‘목표에 도달한’ ‘충분히 달성된’, ‘완전한’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은 ‘모든 것이 구비되어 모자람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닮은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퍼펙트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구비되어 모자람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그야말로 퍼펙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탄의 꼬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그 퍼펙트한 삶에서 쫓겨나 온전성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그 온전함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절).
사람이 온전할 수 있을까요?
단언컨대 ‘온전할 수 없다’라는 답이 맞는 말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바로 보는 입장에서는 ‘내가 온전하다’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한정된 공간 가운데서 제한된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시공간의 제약됨과 사고 능력의 한계를 체험하는 것이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을까요?
물론 ‘온전’의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지만 인간은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영웅들이 다 그렇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홍수 후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벌거벗고 돌아다니다 자녀에게 수치를 당합니다. 당대의 의인이고 온전하다는 노아도 결국은 온전한 인간은 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은 어땠을까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살았겠지요?
그런데도 그는 흠이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노아처럼 그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실수도 있었고 부족함도 있었습니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도 보십시오. 그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한없는 사랑을 받았던 다윗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고 그런 사람들의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어떤 인간도 의로울 수 없으며,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완전에 이르기를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처럼 ‘온전’을 회복해야 합니다.
퍼펙트한 사람을 희망해야 합니다.
2.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완전한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아담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밝혀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6∼27절)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히브리어로 ‘צלם’(쩰렘)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형상’으로 번역이 가능하고, ‘image, model'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당신의 ‘צלם’(쩰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이 형상(形象), 이 이미지(image)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손상을 입은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요한이 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증언한 글입니다.
요한은 그 글의 처음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8절에서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언합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즉 ‘צלם’(쩰렘)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분 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צלם’, 쩰렘)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미국 유전자 학회지에 소개된 보고서에 의하면 부모는 자식에게 5만 종류 이상의 유전자를 물려준다고 합니다. 그 5만 종류의 유전자 안에는 부모가 살아오면서 했던 말이나 행동, 습관, 선행, 거짓말, 기쁨, 슬픔 같은 감정까지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부모가 선한 일을 하게 되면 그 유전자가 후손들에게 옮겨져서 후손들이 복을 받고, 부모가 악한 일을 하면 나쁜 유전자가 후손에게 옮겨가서 씨(氏)가 끊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자식은 겉모습만 닮는 것이 아닙니다. 혈액형도 닮고, 식성도 닮고, 음성도, 걸음걸이도 닮습니다. ※전도사 시절의 일입니다. 당시 아들이 3살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살던 아주머니들이 제 아내에게 아들을 보니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제 걸음걸이하고 똑같은 자세로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는 말씨도 행동도 생활습관도 닮습니다. 집안의 자녀들은 TV보는 습관도 부모를 닮습니다. 밥을 먹을 때 젓가락을 잡는 것 등 많은 면에서 부모와 꼭 닮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27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צלם’(쩰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즉 ‘צלם’(쩰렘)이십니다.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시고 그분 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우리는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צלם’, 쩰렘)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3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온전한 사람이란 모든 면에서 전인적인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될 때에 온전함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온전>은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몸(Soma)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지성(Logos)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감성(Pathos)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넷째는 덕성(Ethos)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영성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3.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은 퍼펙트(perfect)한 삶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4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립니다. 분노와 미움이 일어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것처럼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하시지 않고 사랑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 경험하지 않습니까? 나를 죽이려 하고, 나를 해하려 하고, 나를 공격하려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지막지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죽이려 하고, 나를 상해하려 하는 이를 미워하고 그들에게 보복을 하고 나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는 일은 차라리 훨씬 쉬운 일입니다. 아니 쉬운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미워하고 저주할 때 어떤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나를 죽이려 하는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만 해도 잘하는 일이고, 그를 잊어버리려 하고 마음속에 떠올리지 않으려 하는 것만 해도 무척 잘하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또 다시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갈4:19).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법에 대해서 몇 가지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너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담을 하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악담하거나 저주하는 말을 들으면, 악담과 저주하는 말로 되받아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도 축복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남에게 해를 당하면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그들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너희에게 악을 행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박해를 받으면 그를 저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에게 악을 행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천국 백성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의 가르침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명령만 하지 않고 친히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떠나갔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들도 원수를 사랑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천국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5:2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성령님은 능히 이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명예, 지식, 재물, 승진 등을 달라고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더 좋아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신적인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순종하면서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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