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강해(14)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마태복음 5장 33∼37절 -
요즘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정제되지 않은 말이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시정잡배,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막말로 얼마나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된 인터넷과 SNS 공간은 막말·욕설·유언비어의 바다입니다. 자기와 정치적으로 생각이 다른 것 같으면 대뜸 저주를 퍼부으며 공격합니다. 연예인에 대한 호감·비호감 같은 별것 아닌 일을 두고도 의견이 다르다는 것만 확인되면 수백·수천 건의 인신공격과 악성 댓글이 쏟아집니다. 무슨 사건이 생기면 당사자의 신상을 샅샅이 까발려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짓밟기가 예사입니다.
인터넷에서 막말로 다툼을 벌이던 30대 남자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갑내기 여자를 찾아가 살해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 비슷한 정치 성향의 글을 올리며 어울려 지내다 도중에 욕설을 주고받는 사이로 변했습니다. 남자는 급기야 여자 집을 찾아가 아파트 계단에서 여자를 칼로 찔러 숨지게 했습니다. 이 두 남녀는 '5·18' 같은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감정이 격앙되자 나중엔 서로 "너는 창녀다" "너를 낳은 부모가 미역국을 토하고 싶을 거다"라는 둥 상소리를 퍼부어대다가 살인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종말을 맞았습니다.
인터넷 채팅방에서 대화하다가 기분이 상한 10대 3명이 채팅 상대인 20세 남자 대학생을 공원으로 불러내 흉기로 살해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는 ‘막말은 관속에서도 하지 말라’는 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막말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 말을 하는데 어떤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5백만 마디의 말을 한답니다. 원석도 갈고 다듬으면 보석이 되듯 말도 잘 갈고 닦고 다듬으면 보석처럼 빛나는 예술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 갈면 다루면 사람을 괴롭히는 결국은 죽이는 무기가 됩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맹세의 주제를 다루시면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말을 진실하게 하고,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1. 맹세하지 말지니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33절을 보십시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맹세는 어떤 약속이나 목표를 꼭 실천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큰 것을 두고 맹세하여 자신의 말한 것에 대해서 최후 확정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맹세를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0장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20절)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여 아브라함을 복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맹세를 함부로 하고 지키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였는데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폐해를 아시고 헛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19장 말씀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12절)
맹세는 신중히 해야 하고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그 맹세를 지켜야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이나 제단이나 하늘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 바치는 예물이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23:16∼22).
당시 사람들은 서로 싸우다가 자신이 불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맹세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님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로 맹세하고 땅으로 맹세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맹세하고 자신의 머리로 맹세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백성에게 성전으로 맹세하면 의미가 없고 성전에 금을 놓고 맹세하면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취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런 맹세법을 남용하여 율법사들이 서민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니 하늘로 맹세하지 말고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니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읍이니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머리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만 진실만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맞는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자신의 머리 터럭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는 인간이 무엇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 자체가 위선입니다. 교만입니다. 악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하나님과 한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세례 받을 때 한 약속을 잘 지키십니까?
교사나 찬양대원, 집사, 또는 장로나 권사로 임직 받을 때 한 충성서약을 잘 지키십니까?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하지 않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맹세 자체를 부인하신 것을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엣세네파나, 재침례파, 그리고 퀘이커 교도들은 이 말씀을 맹세를 부인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서 결혼서약이나 법정에서 하는 맹세조차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맹세 자체를 부인하는 말씀이 아니라 맹세의 오용에 대해서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가 편리하도록 믿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통해 비난 받으시는 것보다 믿는 신앙인들 때문에 비난을 당하십니다.
소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교묘한 위선적 믿음과 신앙의 탈을 쓴 영적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교회가 욕을 먹고, 신앙인들 모두가 도매금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습니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교회에도 교회법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학칙이 있습니다. 작은 모임에도 회칙이 있습니다. 이 국법이나 교회법, 학칙이나 회칙은 모두 넓은 의미의 맹세입니다. 맹세나 서원 혹은 약속과 같은 것이 없다면 이 사회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질서나 정의는 모두 넓은 의미의 맹세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맹세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맹세를 오용하고 남용하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2.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 ‘아니오’를 분명히, 확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한다는 것은 타협이나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맹세를 하고 불리하면 꽁무니를 빼고 타협을 하려고 합니다.
신앙은 타협이 아닙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나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충성스런 신하는 간신들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충성스런 십자가 군병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실한 말을 하면 하나님이 보장하시고, 하나님이 성취해 가십니다.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불리하면 발을 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말에 책임을 져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는 말씀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사람은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결과에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뜻하지 않는 좋지 않는 결과일지라도. 결과에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책임감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친히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는 전혀 상관 없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를 안타깝게 여기셨고, 죄의 열매로 사형 선고 받은 인간을 구원할 방안을 강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구원할 길을 펼쳐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자신의 독생자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죄에 대해 책임 없다 하시며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머물지 않으시고 친히 해결자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책임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가정에서 책임감 있는 부모가 되십시오.
교회에서 책임감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더 나아가 세상에서 책임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십시오.
허물의 결과에 책임을 질 뿐더러 나의 허물과 관계없는 타인의 허물과 결과에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 세상은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집니다.
마치 책임 있는 가장에게 가정이 맡겨지듯이. 책임 있는 성도에게 교회가 맡겨집니다.
이것은 책임 있는 자만이 현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 있는 사고와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변명과 책임 회피는 마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함부로 입을 벌리지 마십시오.
특히 소문을 듣고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말을 했다면 반드시 책임을 지십시오.
행동도 조심하십시오.
모든 일을 신앙적으로 해야 합니다.
모든 말을 신앙적으로 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듯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듯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서약이나, 직장에 들어갈 때의 서약이나 어느 단체에 가입할 때의 서약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맹세 안에는 옳고 그름을 확실히 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즉 신용을 가지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왜 사람들이 맹세합니까?
믿어주지 않을까봐 맹세하는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에는 독특한 벌목이 오랜 전통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나무를 벨 때 도끼나 톱 같은 연장을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를 벨 때에도 그저 맨손으로 덤벼듭니다. 그들의 독특한 벌목 방법은 대강 이렇습니다.
먼저 나무를 베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순번을 정합니다. 하루에 한 명씩 담당자를 정하면 순서를 맡은 사람이 동틀 무렵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최대한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내려옵니다.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 나무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내려오는 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벌목법입니다. 이런 기괴한 행동을 한 달 정도 계속하고 나면 아무리 큰 나무라도 힘없이 쓰러지고 맙니다. 밤새 산소를 만드느라 지쳐 있다가 새벽이 되어 조금 쉴 만하면 사람들이 올라와서 아침마다 소리를 버럭 지르는 통에 나무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말은 길든 짧든 엄청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내 말로 인해 상처 받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 말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꾸밈없이 말하기 바랍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마십시오.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코람데오(Coram Deo!, 神前意識), 즉 하나님 앞에 있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산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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